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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12-01 (월) 06:5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575    
하나님의 진노(롬 1:18-23)



여러분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 놀라운 우주 만물을 디자인하고 만드신 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나름대로 숭배할만한 자질이나 성품이 가득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은 이런, 저런 분이라고 상상해 만든 분입니까? 내 소원을 간절히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분입니까? 우리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무교, 유교, 도교, 불교를 다 혼합한 종교의 신입니까? 아니면 정말 사람들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성경에서 계시한 스스로 계신 분입니까?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는 가정(assumption) 하에 스스로 만들어 놓고 믿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사람을 향해 진노하거나,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을 그렇게 고통 중에 있게 하실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에서는 지옥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즉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 일부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판단해서 믿는 것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6절).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었습니다(17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져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의 진노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으로 미운 감정이 격하여져 말이나 행동으로 폭력을 행하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선하기 때문에, 거룩하기 때문에 악에 대하여 진노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다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막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모든 불의”에 대한 것입니다. ‘경건치 않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는 것을 말합니다. 관계가 잘못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단수(sin)로 사용할 때 이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불의’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사람들에게도 잘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복수(sins)로 사용할 때, 혹은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할 때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병이 들어 아플 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즉 열이 난다든지 기침이 심하든지 피부에 두드러기가 난다든지 설사를 한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든지 하는 것들이 후자라면,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암세포가 전자입니다. 그럴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치료해 보려고 애쓰면 잘 안됩니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해야 병이 낫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부자 관계로 바뀌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져야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데도 불구하고 대적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해서 인간들은 건강도, 물질도, 필요한 것을 다 받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 안에 이미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동물들과 달리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높은 도덕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양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도덕적이지 않는 사람을 짐승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를 혹자는 종교심이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20절)고 하였습니다. 즉 이 세상 우주 만물을 보아도 누군가가 그 영원한 능력으로, 신적인 능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도, 아니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하는 피조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신묘막측한 우주 만물이 오랜 전에 아주 큰 폭발로 인하여 만들어졌다는 Big Bang 이론이나 미세한 아메바가 진화했다는 이론을 믿고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창조물이 있다면 창조주가 있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디자인된 물건이 있다면 디자이너가 있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을 몰랐다 라고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인정하며 찬양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절)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신세지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햇빛, 물 한 모금, 공기 그 어느 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주, 디자이너인 하나님을 알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습니다. 반항합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만듭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 하지만 오히려 더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가치나 영광을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worship or worth-ship)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피조물을 경배하는 인간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고대 이집트, 곧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애굽입니다. 그들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고 일컫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풍부한 자원으로 강대국을 세웠습니다. 마치 이 축복의 땅 미국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해야 할 나라고 그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해를, 비옥한 땅을, 나일강을 숭배했습니다. 선물(Gifts)을 주신 분(Giver)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갖 짐승들과 벌레의 형상까지 우상으로 숭배한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이 사실 다 우상들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진노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을 피로 만든 이유도, 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마지막 장자 다 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Giver/Designer 보다 Gifts/Designs 를 숭배합니까?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상)!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His existence)를 그의 지으신 만물 속에서 나타내 주십니다.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인간 창조에서도 그 경이로움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과 신성이 온 우주 만물, 그리고 피조물들에게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진리를 막는” 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진노하신다고 합니다. 그 결과의 일부를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지만 24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already)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그의 진노하심이 나타났고, 아직은 아니지만(not yet) 앞으로 궁극적인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통하여 보여주었는데도 교만하여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말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신과는 다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성경 전체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공의와 거룩함이 함께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귀한 일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됩니다. 이유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만을 치유 받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연계시 즉 일반은혜(은총)으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특별계시인 성경말씀 즉 특별은혜(은총)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똑똑한 척 교만하게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경배(worship)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방황하다가 비참하게 됩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 알고 인정하는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미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을 만나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아름다운 관계 속에 사시는 여러분들! 감사하십시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했지만, 도리어 은혜를 받고, 누리고 살게 하시니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진리 안에서 영으로 찬양하십시오. 경배하십시오. 더 이상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마음을 나누지 마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겸손히 하나님을 일심으로 섬기십시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섬기십시오. 경건하게 사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여러분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 놀라운 우주 만물을 디자인하고 만드신 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나름대로 숭배할만한 자질이나 성품이 가득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은 이런, 저런 분이라고 상상해 만든 분입니까? 내 소원을 간절히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분입니까? 우리나라 문화의 영향으로 무교, 유교, 도교, 불교를 다 혼합한 종교의 신입니까? 아니면 정말 사람들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성경에서 계시한 스스로 계신 분입니까?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래야 한다는 가정(assumption) 하에 스스로 만들어 놓고 믿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사람을 향해 진노하거나, 지옥을 만들어서 사람을 그렇게 고통 중에 있게 하실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에서는 지옥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즉 신구약 성경 전체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 일부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 스스로 판단해서 믿는 것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16절).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었습니다(17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져 의인이라고 불러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람의 진노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사건으로 미운 감정이 격하여져 말이나 행동으로 폭력을 행하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선하기 때문에, 거룩하기 때문에 악에 대하여 진노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음대로 살아도 다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진리를 막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모든 불의”에 대한 것입니다. ‘경건치 않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긋나는 것을 말합니다. 관계가 잘못된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단수(sin)로 사용할 때 이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불의’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사람들에게도 잘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복수(sins)로 사용할 때, 혹은 허물(transgressions)로 번역할 때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병이 들어 아플 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 즉 열이 난다든지 기침이 심하든지 피부에 두드러기가 난다든지 설사를 한다든지 어디가 아프다든지 하는 것들이 후자라면, 병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암세포가 전자입니다. 그럴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치료해 보려고 애쓰면 잘 안됩니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제거해야 병이 낫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대 관계가 부자 관계로 바뀌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져야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데도 불구하고 대적합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햇빛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해서 인간들은 건강도, 물질도, 필요한 것을 다 받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 안에 이미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동물들과 달리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높은 도덕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양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도덕적이지 않는 사람을 짐승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를 혹자는 종교심이라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20절)고 하였습니다. 즉 이 세상 우주 만물을 보아도 누군가가 그 영원한 능력으로, 신적인 능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도, 아니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하는 피조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신묘막측한 우주 만물이 오랜 전에 아주 큰 폭발로 인하여 만들어졌다는 Big Bang 이론이나 미세한 아메바가 진화했다는 이론을 믿고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이 정말 어리석지 않습니까? 창조물이 있다면 창조주가 있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디자인된 물건이 있다면 디자이너가 있는 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을 몰랐다 라고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인정하며 찬양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절) 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신세지지 않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햇빛, 물 한 모금, 공기 그 어느 것도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창조주, 디자이너인 하나님을 알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습니다. 반항합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만듭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 하지만 오히려 더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가치나 영광을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worship or worth-ship)를 드려야 하는 것인데, 피조물을 경배하는 인간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고대 이집트, 곧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애굽입니다. 그들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고 일컫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풍부한 자원으로 강대국을 세웠습니다. 마치 이 축복의 땅 미국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정말 감사를 해야 할 나라고 그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해를, 비옥한 땅을, 나일강을 숭배했습니다. 선물(Gifts)을 주신 분(Giver)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갖 짐승들과 벌레의 형상까지 우상으로 숭배한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이 사실 다 우상들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진노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을 피로 만든 이유도, 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마지막 장자 다 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Giver/Designer 보다 Gifts/Designs 를 숭배합니까?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창조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상)!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존재(His existence)를 그의 지으신 만물 속에서 나타내 주십니다.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인간 창조에서도 그 경이로움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3-14)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과 신성이 온 우주 만물, 그리고 피조물들에게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진리를 막는” 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진노하신다고 합니다. 그 결과의 일부를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지만 24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미(already)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그의 진노하심이 나타났고, 아직은 아니지만(not yet) 앞으로 궁극적인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통하여 보여주었는데도 교만하여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다면 말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신과는 다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성경 전체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공의와 거룩함이 함께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덧입혀지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귀한 일이요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냥 인간으로 살면 안됩니다. 이유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교만을 치유 받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연계시 즉 일반은혜(은총)으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특별계시인 성경말씀 즉 특별은혜(은총)을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똑똑한 척 교만하게 살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경배(worship)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방황하다가 비참하게 됩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것, 알고 인정하는 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미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을 만나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셔서 아름다운 관계 속에 사시는 여러분들! 감사하십시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했지만, 도리어 은혜를 받고, 누리고 살게 하시니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진리 안에서 영으로 찬양하십시오. 경배하십시오. 더 이상 우상을 만들지 마십시오. 마음을 나누지 마십시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겸손히 하나님을 일심으로 섬기십시오.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섬기십시오. 경건하게 사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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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 주일설교 부활의 유익(고전 15:29-34) 한태일 목사 2013-08-12 1944
564 수요설교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의 복(신 30:11-20) 한태일 목사 2013-08-09 1850
563 주일설교 부활의 완성(고전 15:20-28) 한태일 목사 2013-08-05 2150
562 주일설교 만일 육체의 부활이 없으면(고전 15:12-19) 한태일 목사 2013-07-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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