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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5-06-15 (월) 05:0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20    
이미, 그러나 아직(롬 7:14-2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경험하는 것이 죄와의 싸움, 겉 사람과 속 사람의 갈등입니다. 믿기 전에는 별로 갈등을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믿고 성령의 인침을 받은 후에는 우리 안의 죄의 성향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의의 성향이 부딪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고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내용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7장 1절부터 13절까지 바울은 과거 시제를 사용하면서 믿는 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이미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계명들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깨닫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지만(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yet) 우리 안에 죄의 성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갈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갈등을 겪으면서 본문에서 세 번씩 반복하여 탄식을, 심령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탄식(14-17절), 두 번째 탄식(18-20절), 그리고 세 번째로 탄식합니다(21-23절). 그리고는 결론을 말합니다(24-25절).
이미 과거에 구원을 받았으나, 현재 상태는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라고 첫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에는 죄 아래 팔렸다고 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그가 겪는 죄와의 싸움이 현재적 경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죄의 노예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어 다시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6장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다만 아직도 육신에 거하는 죄로 말미암아 그 괴로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죄에 팔렸었었다가 비록 지금 구원을 받은 상태이긴 하지만 완전히 죄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기에 말입니다. 그 증거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고 고백한 것처럼, 때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하지 않고 오히려 죄의 욕망을 따라 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 몸은 죄의 작업장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 근원은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성 즉, 죄의 성향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오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탄식에서도 바울은 현재 상태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18절상)라고 한 것처럼, 자신의 육신에는 죄가 가득하더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8절하-19절)라고 한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선을 행하기 보다 원치 않는 악을 행하더라는 말입니다. 그 근원은 역시 죄였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세 번째 탄식에서도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현재 자신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22-23절상)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또 다시 말하기를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22절).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치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라고 고백한 시편 기자처럼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율법에 대해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서 율법을 경시하는 사람들은 그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참된 의미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 속 마음에 율법을, 계명을 즐거워하며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을, 계명들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순종하지 못하게 계속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성향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연약한 육체입니다. 즉 이 육체가 땅에 묻히고, 훗날 주님 재림하셔서 새로운 부활체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 받고 나서야 우리 안에 죄가, 죄의 성향이 아주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이런 갈등에 대한 바울의 결론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절)! 세 번의 탄식을 하고 나서 바울은 진솔한 고백을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내적 갈등, 모순을 순수하게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데 하물며 우리일까 보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탁월한 자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는 자라도, 아무리 성경을 다 꿰뚫고 있는 자라도, 아무리 경건한 생활을 오래한 자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죄에 대한 민감성이 다르겠지요. 믿음의 정도에 따라, 말씀을 아는 정도에 따라, 주님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따라 그 내적 갈등의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시각, 그 깊이와 넓이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초신자가 겪는 갈등과 참 목사가 겪는 갈등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고백의 질이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처음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자신의 죄된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이 무슨 고백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선지자라도, 수양을 많이 하여 고상한 덕을 쌓은 성자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 안에 있는 더러움이 크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방 안의 먼지가 보통 때에는 잘 안 보여도 햇빛이 비취면 잘 보이듯이 말입니다.
그런 선지자나 사도가 아니라도, 성자가 아니라도 영적 갈등, 사탄과의 싸움, 육체의 정욕과의 싸움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시면 가책을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가장 회개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고백이 없는, 탄식이 없는 사람은 그 믿음이 가짜이든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죄를 짓고 나면 반드시 이런 안타까운 고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탄식에서만 끝난다면, 믿지 않는 사람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곧바로 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상) 라고 고백합니다. 더 정확한 번역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죄의 성향으로 인하여 고통하며, 탄식하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너무 그런 시간이 오래 가도 안됩니다. 짧아야 합니다. 곧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기뻐하며 ‘할렐루야!’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주시고,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촛불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내어 맡겨야 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산 제사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연약하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분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의 결론으로 마지막에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하)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믿는 우리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이중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종종 사용하는 말처럼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을 합리화하여 얼마든지 육신의 죄는 지어도 됩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이중적인 생활, 위선적인 생활을 우리 예수님께서는 아주 싫어 하셨습니다.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고민, 영적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우리의 실존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desire)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소욕(desire)이 서로 대적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 전쟁에서 지면 우리 육체의 곤고함을 한탄하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기면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칭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갈등을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고 하였습니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율법이 죄라고 지적하는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행하면 음행(sexual immorality), 더러운 것(impurity), 호색(debauchery), 우상숭배(idolatry), 술수(witchcraft), 원수 맺는 것(hatred), 분쟁(discord), 시기(jealousy), 분냄(rage), 당짓는 것(selfish ambition), 분리함(dissensions), 이단(factions), 투기(envy), 술 취함(drunkeness), 방탕함(orgies) 등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갈 5:19-21).
반면에 성령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이기면, 나 자신(ego)을 성령님에게 양보하면(yield)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바로 사랑(love)과 희락(joy)과 화평(peace)과 오래 참음(patience)과 자비(kindness)와 양선(goodness)과, 충성(faithfulness)과 온유(gentleness)와 절제(self-control)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갈 5:22-23).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바울은 우리 믿는 자 속에 있는 갈등, 겉 사람과 속 사람의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니 7장은 8장과 뗄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어서 8장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을, 그 사랑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 잘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8장의 말씀을 붙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을 좇아 영적 전쟁에서 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를 치료하려면 그 출발이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율법이, 계명들이 가르쳐 줄 때 깨닫는 것입니다. 그 죄로 인하여 자신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 안에 죄가 전혀 없느냐,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고 난 후에 다 경험해 보았습니다. 구원 받고 나서도 연약하여 실수로 죄를 범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다음에는 이기는 것입니다. 점점 믿음이 자라가면서, 주님을 더 알게 되면서, 성숙해 가면서 말입니다.
물론 성숙해져도 또 다른 죄로 인하여 계속 싸움은 계속되고, 또 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꼭 기억하십시오. 이미(already) 구원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아직(yet)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주님 재림하시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오늘을 참고 이겨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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