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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05-23 (월) 05:1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69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1-18)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화목하며, 가족들은 다 사랑으로 하나입니까? 각 구역들이나 우리 교회는 한 가족으로서 화목합니까?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담을 쌓고 불화 속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뉘어져 있습니까? 소통이 안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사랑 대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사도 바울은 2장 1-10절에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로 구원 받은 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 얼마나 다르며, 그들은 선한 일을 위하여 그 가운데 행하도록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1절 이하에서는 에베소교회 내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였던 것을 보고, 저들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충분히 그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만, 선택받은 유대 그리스도인(Jewish Christian)과 이방인 그리스도인(Gentile Christian)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위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둘이 연합하여야 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저들의 과거 형편과 현재의 상태가 얼마나 대조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변화를 받은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11-12절)라고 하셨습니다. 즉 과거에 저들은 사실 자랑할 것이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유대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할례를 받지 못했다 하여 마치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취급 받아 모욕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축복에서 벗어나 있던 이방인이요,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 해당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살이에서 전혀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도 모르던,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옛 사람,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교회 밖에 있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있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가깝게 되었고(13절), 교회 안에서 새 사람이 된 모든 자들이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경배하고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중간에 막힌 담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화평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4-16절)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 구절들에서 중요한 단어는 "화평" 혹은 "화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평안"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없애주셨다면,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 혹은 우리의 교우들 사이의 막힌 담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없애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분열과 미움, 싸움과 분쟁이 왜 생기는 줄 아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시비와 불행, 슬픔과 고통이 왜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특성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들의 교만으로 생긴 벽(wall) 때문입니다. 이는 태초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는 것인데,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고 싶은 마음, 질투, 시기심이 모두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이 교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만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벽은 교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은 출신 성분으로 교만이 시작됩니다. 무슨 혈통이나, 어떤 가문이냐, 국적이 어디냐, 어느 민족이냐, 흑인이냐 백인이냐를 자랑합니다. 전라도냐 경상도냐 충청도냐 서울 본토백이냐 이러한 것이 우리 사회의 벽을 만듭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하고 축복받은 민족임을 자랑하여 교만에 빠졌던 것입니다. 주님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히브리인이 아닌 자들을 무시하며,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족보를 자랑하였습니다. 이 미국사회의 인종차별도 마찬가지요, 우리 한국의 지역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적인 조건으로 담을 쌓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식의 교만도 있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매우 지적이고 뛰어난 철학자들을 낸 민족임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며 너희가 아는 게 무엇이 있느냐는 식으로 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헬라인과 야만인, 지혜로운 사람과 무식한 사람 사이에 담을 쌓고 갈라 놓았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갈등과 억압과 싸움이 생겨났습니다. 거기에 경쟁이 있고 억압과 싸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벽, 분쟁의 요인은 욕심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가지려고 애씁니다. 서로 더 가지려고 애쓰는 욕망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쟁이, 미움이 싹트는 것입니다. 벽이 생기는 것이지요. 높은 자리를 쟁취하려는 열망, 영웅이 되어 보려는 공명심, 유명해 지려는 야망 등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고용인과 고용주와의 관계에서나,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에서나, 아니 심지어 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교회 안에서까지 이러한 욕심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한 자녀가 다른 아이들 보다 똑똑하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똑똑한 자녀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지 못한 자녀는 대학 진학조차도 못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열등감이 생기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반항심과 복수심이 싹틉니다. 빈정거리고 질투심이 일어납니다. 한편 똑똑한 아이는 교만에 더욱 빠져들어 갑니다. 그들 사이에 높은 담이 쌓이는 것입니다. 가정이 분열됩니다. 깨져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벽을 무너뜨릴 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박사가, 돈이 많은 부자가, 권력자가 하나되게 할 수 없습니다. 억지로, 물리적으로 연합하라고 해서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져 화평해 집니까? 이 세상의 물질이 여러분의 가정에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참된 평화가, 평안이 없습니다. 해결책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이 십자가에 내 자신의 자아를 함께 못박을 때에, 죽을 때에 벽이 무너지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나서 이 세상의 모든 분쟁과 시기, 다툼, 고통을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합니까?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늘 문제가 생기면 남을 비난합니다.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는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가르쳐 주며 인간을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고 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우리에게 '네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네 자신은 언제나 실패자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완전한 실패자, 죄인이기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만하였던 사도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그는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교만하였던 생각들을 떨쳐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곤고한 인간임을 자각하게 했습니다. 그를 겸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참된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어느 한 쪽을 편드는, 편애하는 법이 없습니다. 다 똑같이 취급합니다. 이유는 누구나 다 완전한 실패자,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낮아지지 않는 한 십자가는 전혀 쓸모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지, 나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나 자신의 교만을 십자가에 목 박아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깨닫게 해줍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무식한 자든지 유식한 자든지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같은 죄성을 지닌 연약한 죄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동등한 사람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으로서 다른 이방인들과 같이 실패하여 놓고는 무슨 자랑할 것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가지고서도 지키지도 않으면서 율법을 가진 것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똑똑하여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어떻게 사는 줄을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마음에는 번민과 고통이 가득차 있고,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살아가면서 무슨 자랑할 것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으시면, 자신은 낙오자요 철저한 죄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15절에 변화된 새(kaino,n)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7-18절)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지요. 막힌 담이 무너져서 서로 연합하여 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나뉘게 하는, 가족 사이에 벽이 있습니까? 한 지붕 안에 살면서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어떤 벽 때문에 소통이 잘 안되고 따로 따로 살아갑니까? 우리 가든교회 가족들 사이에도 벽이 있습니까? 그 벽 때문에 완전히 따로, 교제가 절단이 된 상태로 신앙생활하십니까?
   정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그 막힌 담을 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새 가정이 되게 하십니다. 새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새 교회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된 내가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낮아져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너뜨리신 벽을 내가 도로 쌓는다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내가 누구였던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성령님이 계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겸손히 내게 허락하신 가족들을 섬겨야 합니다. 가족애를 넘어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정말 우리 가정은,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의 가정 위에, 우리 교회 위에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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