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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07-18 (월) 05:5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21    
성도의 의무(2) (롬 12:14-21)


우리는 세상에서 종종 불공평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도 있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사건건 괴롭히는 사람들, 그야말로 원수라고 생각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고 사는 우리 성도들의 개인적인 의무와 교회에서의 의무를 살펴보았습니다(9-13절).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대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우애하며 존중히 여기고, 봉사할 때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갖고 부지런히 하라고 했습니다. 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참고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세상에서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까리따스의 사랑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14절)고 합니다. 여기 ‘축복한다’는 단어는 좋게 이야기 한다는 뜻입니다. 장례식에서 ‘조사(eulogy)’를 하는데, 이 조사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 조사를 하면서 나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즉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좋게 이야기해야지, 나쁘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약 백성들이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내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대주고, 속옷을 빼앗기 원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마 5:39-41). 그리고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되었던 죄인들에 대하여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아가페 사랑에 대한 반응,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복수하고 싶은 사람을 오히려 위해 기도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를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 열 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를 복수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19절; 신 32:35, 삼하 22:48, 나 1:2)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내가 복수하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을 창조주, 주권자가 다스리고 갚으십니다. 나도 피조물인데 내가 주권자처럼 하면 곤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주께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 10:30)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원수를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하면 그가 부끄러워하며 회개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복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절)고 하였습니다. 우리 원수가 배 고파하고 목말라 하면 고소하게 생각하며 좋아하지 말고 그가 깜짝 놀라게, 감격하도록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머리에 숯불을 놓으면 얼굴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그로 부끄럽게 하여 다시는 핍박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니 마음에 감동을 받아 회개할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 하였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정말 이기는 것입니다. 복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며, 더욱 정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못된 기질, 혈기, 습성을 버리게 합니다. 옹졸했던 마음을 바다와 같이 넓게 합니다. 얼마든지 용서하고 품을 수 있게 합니다. 더욱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우리 주위에 있는 분들과 마음을 나누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5절)고 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 갑니다. 슬픔을 당하여 우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슬픔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함께 슬퍼합니다. 또 좋은 일을 만난 사람을 보면 함께 좋아합니다. 사람의 죄성은 이웃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지만 까리따스의 사랑의 성도들은 기뻐합니다. 함께 좋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믿는 성도들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슬픔을 당한 자들과는 함께 슬퍼하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지 초대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보다는 쉽다. 우리가 웃는 자와 함께 웃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고상한 인격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까리따스 사랑으로 당연히 함께 즐거워해야 하는데 죄성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성도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가 심보가 고약하면, 불신자의 마음과 똑같으면 그건 믿음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옆에 있는 분들에게 마음을 주라고 합니다. 비록 마음을 주었다가 실망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고, 갚아주십니다.
스웨덴 속담에 ‘Shared joy is a double joy; shared sorrow is half a sorrow’ 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그 슬픔은 반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마음을 나누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군다나 한 피 받아 한 형제가 된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1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이해(understanding) 혹은 마음가짐(mindset)을 의미합니다. 서로 이해하려고 하면서 아래서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슬픔이던 기쁨이던 나눌 수 있습니다. 즉 교만한 마음이 서로 나누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 사랑은 겸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까리따스의 사랑도 겸손입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데 처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겸비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은혜가 넘쳐서 위로와 감동과 치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높은데 두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시기 질투와 미움과 상처가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며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17-18절)고 하였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 말은 14절에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악하게 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지 말라는 뜻보다는, 모든 사람이 보기에 일반적으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볼 때에 내가 나서서 복수하려고 하기 보다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생각하고 선한 일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악한 일을 보고 때로 정의감이 생겨서 사회적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함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공정하게 판단하고 벌을 줄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만이 공정하게 벌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기에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는 말씀은 여기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덕스러운 대인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화평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적을 만들지 마십시오. 물론 나는 원하지 않는데 상대방이 적대감을 계속 갖고 있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오늘 말씀대로 살면 적어도 여러분의 마음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에는 평강이 없어도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덕스러운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닮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보여져야 합니다. 성도들과의 만남은 거의 주일에 한번이지만, 세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입니다. 대상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스페니쉬이든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화평하십시오. 성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구약성경에 보면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레위와 시므온이 여동생 디나가 세겜성에서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을 듣고 복수를 하고자 간교한 궤계를 써서 할례를 받아 고통 중에 있는 세겜성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세겜성의 모든 가축과 재물을 빼앗고 맙니다(창 34장).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야곱은 그 아들들을 잘 했다고 칭찬하기는커녕 야단을 칩니다. 그리고 나중에 70년쯤 지난 후 야곱이 숨을 거두면서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시간에 그 두 아들을 저주합니다(창 49:5-7). 혈기대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그들이 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자기를 팔아 넘긴 형제들을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겼습니다. 도와주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성도들도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인간인지라 얼마든지 싫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못 살게 구는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저주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쉽게 용서합니까? 아니 내가 착해서 복수는 하지 않을망정 어떻게 그런 사람을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약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고 하면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가능합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은혜가 있다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를 기억합니까? 그는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억울하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던지는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자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어떻게?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셨기에 말입니다. 아니 우리 기독교 역사상 그런 삶을 살아간 위인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원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온 세상에 꽤 많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너무 힘든 요구를 하십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미움을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헤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할 수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됩니다. 결코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악을 악으로 갚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덮으라고, 이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조차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라고 합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부끄러워하며 감동을 먹고 변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가 아니라면, 지옥에 갈 자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데에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 데에 처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데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늘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하였으며, 이어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고 하였습니다. 내주하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주신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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