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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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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04-13 (목) 11:08 |
ㆍ분 류 |
수요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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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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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고난의 뜻을 안다면(눅 23:13-25)
종종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여인들을 볼 때, 그저 아름다운 장식으로 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거나, 자신이 신자임을 자랑하기 위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2000년 전에 그런 장식을 하고 다녔다면 모두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며 미치광이나 정신병자로 봅니다. 이유는 그 당시에 십자가는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의 상징(symbol)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듯이(신 21:23) 말입니다. 아주 천한 계급의 사람들 중 큰 범죄자들에게 지워주던 형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위에, 극악(極惡)한 죄인들을 처형하기 위하여 세워지던 십자가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30세가 되기까지 목수 일로 아버지를 도왔으며, 3년 동안의 사역 기간에도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시던 예수님께서 마지막 그의 삶을 마감한 곳이 바로 '해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골고다(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였습니다(요 19:17). 그 십자가 위에 주님은 그의 지친 몸과 가시 면류관에 찔려 핏자국이 흥건한 머리를 기대면서, 궁극적인 심판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실 때, 메시아로 오신 아들을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그들을 향한 복수나 공정한 심판을 부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용서를 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생의 두 번째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때문에 그 후 2000년 동안 십자가는 많은 예술가, 시인, 작가, 음악가, 정치가, 심지어 보석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왔던 것입니다.
저는 올해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간과 정사기념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동안 베드로의 철저한 실패(눅 22:54-62),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는 자들에게 조롱과 모욕을 받으신 후, 산헤드린 공의회의 불법재판을 받으신 예수님(눅 22:63-71), 빌라도 총독과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심문을 당하시는 모습(눅 23:1-12)을 살펴 보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고 풀어주려 했지만, 군중들 눈치를 보고 헤롯에게 넘겼습니다. 특히 호기심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원했던 헤롯에게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을 위한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기적이 아니라면 침묵하시는 주님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헤롯이 입힌 빛난 왕복 차림으로 다시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 다시 심문을 받고 십자가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입니다.
대제사장들, 관원들 즉 장로와 서기관들과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그들의 고소는 합당하지 않고 죽일만한 죄가 없다고, 헤롯도 그래서 자기에게 돌려보냈다고 말하면서 그저 몇 대 때리고 놓아주겠다고 합니다(13-16절).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17절이 빠졌는데, 18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아마 그들이 절대로 놓아주면 안된다고 하니까 그럼 유월절 기간에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로마의 관습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참고- 마 27:15; 막 15:6).
그랬더니 무리가 일제히 예수님은 죽이고 성중에서 민란을 일으키며 살인한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합니다(18-19절).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고자 하는 죄목을 가진 바라바였습니다. 그런데 무죄한 예수님은 처형하고, 정작 죄가 확실한 바라바는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그들에게 말하지만(20절),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죽일 죄를 찾지 못했으니 그냥 때리고 놓아주겠다고 합니다(22절). 하지만, 빌라도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기가 다스리는 군중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워 그들과 논쟁하는 처지로 하락했습니다. 그래서 타협하려고 하였습니다. 채찍질하고 놓아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더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니 지고 맙니다(23절). 양심을 거스려, 비겁하게 불의한 군중들에게 굴복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형 선고를 합니다(24절). 그들의 뜻대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줍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과거에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비겁하게 불의의 편을 든 적이 없습니까?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양심을 어기고 부끄러운 죄를 범한 적이 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며,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 실제로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자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유월절에 피를 흘리고 죽는 그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잠깐 이 처절했던 십자가를 한번 묵상해 보십시오.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형벌,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히려 이 세상에서 승리하여 기쁨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당하신 고통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어떤 고난과 고통이었습니까?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던 베드로! 철저하게 실패하여 주님을 배반하고 통곡하며 회개하던 베드로는 후에 기록하기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벧전 2:22-24)고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 고난의 뜻을 아는 성도라면 우리 주님을 본받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고자 하는 동기는 십자가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그 보혈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평강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시오. 바로 앞에 얼마 있지 않아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때문에 매를 맞으면서 억지로 참는다면 무슨 칭찬을 받겠습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 참으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아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십니까? 십자가를 자랑하십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십자가는, 자랑해야 할 십자가는 생각 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사로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필요하지만, 흐르는 눈물을 씻고 강인함으로 고난과 시련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세상과 싸우면서 고난 받는 영웅들이 아니었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나아갔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배우지 못했어도, 지위가 낮아도,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해도 결코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세상 앞에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어떤 영광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백년 전에 살았던 George Bennard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찬송합니다. 우리 모두의 진실한 찬송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 집에 나를 부르실 그 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최후 승리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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