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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4-15 (월) 06:0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35    
우리가 믿는 것 (3) (마 27:26-36)


우리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사도신경 가운데, 지난 주일에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주가 되시고, 또한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과 다음 주일 부활절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왜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곧 그 사역(ministry)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성탄절로, 고난주간으로, 수난일(성금요일)로 인도하는 부분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을 믿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과학을 절대시하는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은 공상, 혹은 신화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와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눅 1:35)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소식을 듣고 근심 중에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증거해 주기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도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고 죄와 관계없이 출생할 것을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이사야 선지자는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 자체가 증거합니다. 예언되어진 말씀의 성취입니다. 만일 이러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리학상 불가능하다고 해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하거나 성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고 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의 성육신(incarnation)이 중요합니까? 이러한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탄생은 이 세상 역사상 전무후무한 탄생으로, 우리 예수님 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임을 증거하며,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 무죄하신 분임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녀의 성관계로 나셨다면 그도 또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알도록 하셨습니다. 친히 육신의 몸으로 고통과 유혹을 당하심으로, 우리들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히 4:14-16).

둘째로, 우리는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종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희생제물로 오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크고 높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정치적인 왕으로, 이방나라 심판자로서 기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Son of Man)'로 부르며, 현세적이고 정치적이기보다는 예표된 영적인 메시아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종종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사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었습니다(눅 4:16-30).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았던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정죄하며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던 것입니다(마 26:59-66).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 사이에 로마제국에서 파송된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완고하고 가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지 못했고 정치는 부패하였습니다. 당시 총독의 관청은 가이사랴에 있었지만 유대인의 소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주 예루살렘에 출장 근무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종교문제로 상소가 되었고, 그 일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의 꿈을 통하여 예수님이 무죄한 자임을 알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주려는 순간적인 양심작용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유대 군중의 소리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양심의 소리보다 민중과 권력의 소리를 더 두려워하여 결국, 대대로 기독신자의 입에서 정죄되고 있는 역사적인 비극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신경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아래)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 말은 기독교의 역사성, 사실성을 입증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3년 동안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가르치고, 동고동락하던 12제자들에게까지 배신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것입니다. 못 박히시기 전날까지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며 섬기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요 13장).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하시고(26절), 옷 벗김을 당하시고(28절), 가시 면류관을 쓰셔서 머리에 피를 흘리셨으며(29절), 조롱을 받으시고 침 뱉음과 갈대로 머리를 맞으시고(30절),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35절).
물론 가장 큰 고난은 십자가 상에서의 고통이었겠지요. 그것을 알았기에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부르짖지 않았습니까?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 다른 큰 행악자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라고 하셨습니다. 주위에서는 백성들이 구경하며 비웃고 희롱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상에서 첫마디는 그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자기를 못박는 자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두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여 위하여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메마른 심령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찔림이 되지 않습니까?
오늘도 그 기도를 드리시는 주님의 부르짖음에 여러분은 용서 받았습니까? 죄 사함을 받으셨습니까? 죄가 없으신 분이 대신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죽어가시면서 바라셨던 죄 사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진노를 그 아들에게 퍼부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죄 용서 받지 못할 죄인들이 당할 하나님의 불 심판을 감당하시는 중이었기에, 그 같은 고통과 진노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와 자비를 구하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를 믿습니다.
십자가는 고대 로마를 비롯해 애굽, 페르시아, 앗시리아, 그리고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행하던 잔인하고 혹독한 최악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 당시 자유인에게는 사용치 않았고 노예나 반역자, 살인 강도들에게만 참혹하게 집행되었습니다. 즉, 모든 죽음이 다 고통스럽지만 예수의 죽음은 잔인한 악형을 받으신 가장 고통스런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던 제자 가롯 유다에게 배신 당하신 예수님은 붙잡혀서 6차례의 심문 끝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온갖 조롱 속에 넘어지고 쓰러지며 골고다로 향하셨습니다. 구레네 시몬에게 지던 십자가를 대신 지우리만큼 괴롭고 힘든 것이었습니다(32절). 채찍을 맞으시고 머리에는 가시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6시간 동안을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다가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사건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은 성경에서도 가르쳐 주듯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고 하였습니다. 화목제(i`lasmoj, atoning sacrifice)라 함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진노(화)를 달랜다'(propitiation)는 뜻으로 하나님께 인간의 불의, 불순종에 대한 심판(롬 6:23)을 달래기 위한 제물입니다. 또 하나는 '죄를 씻는다, 정결케 한다'(expiation)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씻음 받았다, 정결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마 26:42, 막 14:36, 요 17:4),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요 3:16, 13:1, 15:13). 둘째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기억하십니까? 십자가 상에서 부르짖던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음성을 말입니다. 그 순간만큼 처절한 고독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내 팽개쳐진 자신을 향한 절규 말입니다. 육신의 고통의 절정에서 토해내신 부르짖음이지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하신 영혼의 아픔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말합니다(신 21:23). 저주받아 버림받은 구원자였습니다. 우리를 그 모든 죄와 슬픔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지 않습니까?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 하나님께로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마 잠시 좋아하였을지도 모르는 십자가이었으나 그 죽음은 사탄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이해하지 못할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23).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우리는 마리아의 고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고 하였습니다. 종이라고 자신을 말합니다.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면 종처럼 살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본을 보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 인격의 특징입니까? 예수님 사랑한다 찬양하며, 고백하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님도 지적하셨듯이 어쩌면 천박한 종교적 감정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나의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은혜를 감사하셔야 합니다. 회개하셔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강도를 기억하십니까? 주님은 죽으시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 원하셔서 그 기회를 복음 전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한 강도는 예수님의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씀을 통하여 진실로 회개함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천국에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 강도는 진정한 회심으로 완전한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그 결과는 다른 한 강도와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분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처럼 마땅히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회개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삶의 중심이 됩니다. 십자가의 감격이 사라지고, 그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은 단지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죄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요. 참회의 눈물이 없는 예배, 지은 죄에 대한 아픔이, 애통이 없는 기도,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가지 않는 어두운 생활은 모두 참된 회개가 사라진 단지 종교생활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은 식어지지 않았는지요.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그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마 구원받은 강도는 낙원에 들어가면서도 이 땅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 섬길 수 있도록 남겨진 제자들을 부러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부끄러운 구원만 받았기에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그 목적이 이 땅에서 주님 위하여 살도록 아직 데려 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남은 인생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에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그분 곁에 있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눅 9:23)고 하신 것처럼,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여 필요하다면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는 제자들, 십자가의 감격을 안고, 기꺼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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