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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7-08 (월) 06:1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16    
배척을 당해도(눅 4:14-30)


누군가에게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것도 친하고, 좋아하고, 기대하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는가요?
아니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있고, 옳은 일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이 반대하고,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포기합니까? 아니면 그들과 싸웁니까?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14-15절). 그의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칭송하였습니다. 이 전에 아무도, 어떤 랍비도 그와 같은 말씀으로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탁월한 가르침을 베푼 예수님은 이제 고향 나사렛으로 가실 때가 되어 가셨습니다.
나사렛에 도착해서 안식일을 맞아 그의 가족의 평상시 하던 습관을 따라 회당 예배에 참석하셔서 해오던 규례대로 아마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장 4-9절을 예배자들과 함께 복창하였을 것입니다(16절). 그리고 나서 제사장을 따라 기도하고, 제사장이나 랍비가 모세오경에서 한 말씀, 선지서에서 한 말씀을 읽고, 설교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예수님께서 두루마리 성경을 읽을 차례에 이사야서가 주어져서 봉독하다가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그 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7-18절)고 하셨습니다. 이제 막 사역을 하기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 61:1-2절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말씀을 해설하십니다. 자신의 사역이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이 바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는 메시아라는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 팔복 설교에서도 언급하셨듯이, 우리 주님은 심령이 부한 자, 교만한 자,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에게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진리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소식이 복음인 것입니다. 또한 여기 ‘포로된 자들’은 원래 전쟁에서 패하여 사로잡힌 자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되어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죄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병마, 질병에 사로잡힌 자들도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신 것처럼, 진리이신 예수님이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또한 ‘눈먼 자’를 보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실제로 육체적으로 눈먼 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시기도 했습니다(요 9장).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영적인 눈이 먼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정욕과 권력과 명예로 가로막혀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의 눈을 보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눌린 자’는 육체가 부서진 자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영혼이 깨어진 자들, 상한 자들입니다. 사탄 마귀에게 눌린 자들입니다. 그 눌린 것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런 메시아가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예언이 성취된 날이라는 것입니다. 올해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그 은혜를 베푸시는 때라는 것입니다(19절).

문제는 이 복음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 놀라기만 할 뿐 받아들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22절)고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에 다 놀라며 감동을 받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를 못하고 단지 자신들의 고향 사람이요 이웃인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너도 단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 입다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네 말대로 네가 메시아이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에게 기적을 보이고 입증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23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속내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들 속담에 ‘의원이 아프다면 말이 안되니 스스로 고쳐보아라’고 하듯이,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라면 나사렛에 오기 전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고향 나사렛에서도 해보라고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가버나움에서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이 행한 놀라운 기적이 나사렛에도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보고 믿기를 바라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너도 사람인데 뭐’ 조롱하면서, 아니라면 기적을 행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얼마 전에 광야에서 사탄 마귀가 시험한 내용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의 요구대로 고향 나사렛에서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실 텐데 아니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으로 인기를 끌 생각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로서 실제 로마제국을 뒤엎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는 움직임에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영혼 구원을 위한 목적을 이루는 경우에만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을 책망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그들이 죽은 수년 후에야 인정을 받았고, 그것도 그들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24절)고 하시면서, 때로 그들은 멀리 이스라엘 밖으로까지 나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나사렛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기에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 선지자들 가운데 유명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25-27절)고 말입니다. 바로 열왕기상 17장과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유명한 사건들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이 아닌 시돈으로 가서 사르밧의 한 믿는 과부를 발견하고 작은 떡 한 덩이를 만들어 선지자를 대접함으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가족이 굶어 죽지 않게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사람으로 그 부인의 계집 종의 조언을 듣고, 또 종들의 권고를 듣고 믿음으로 요단강에 7번 담금으로 엘리사가 고쳐준 유일한 문둥병자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할 때에 이방인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다 화가 났습니다(28절).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이방인들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게 되고, 이방인들이 받게 된다고 하니까 화를 낸 것입니다. 사실 구약에도 곳곳에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좋은 말씀만을 믿고, 다른 말씀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분을 품고 예수님을 동네 바깥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치고자 합니다(29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 원하시는 바 가버나움으로 내려 가십니다(30절).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가 도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 스스로 무리 한 가운데로 지나가셨을 뿐입니다. 무리가 분노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아마도 당당한 예수님의 모습에 다들 움츠리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담대하게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며,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주위에서 친구들이,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이 반대합니까? 다수가 여러분을 배척합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조차 배척하고 밀어 내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니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그러려니 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사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을 지나쳐 버렸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환영하고 복음을 들을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유는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듣고는 잘 판단해야 합니다. 분별력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 감당을 위하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포기하지 않고 진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옆 길로 가서도 안됩니다. 사탄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당당 하십시오. 담대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한편, 왜 나사렛 동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주옥 같은 설교, 복음을 듣고 마음에 감동까지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배척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선입견(presupposition) 혹은 편견(prejudice) 때문입니다. 한 고향에서 자랐다고 목수의 아들이 과연 메시아일까 의아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을 말해주어도, 진리를 가르쳐 주어도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생명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들의 예를 들어 설명을 하면서 당시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기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더 화를 냅니다.
오늘날도 똑 같은 메시지를 들으면서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어떤 분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혹시 편견이나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그런 것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사고의 틀(frame or box)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똑똑해도 죄인일 뿐입니다. 내 생각,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죄인을 사랑하셔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불행합니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릇이 비어야 음식을 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더러운 것으로,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상처 받고, 깨어지고 하여 간절히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며 욕망 덩어리인지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그렇게 마음을 열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받아들이시며,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은 우리들도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은 늘 가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위에서 아무리 방해하고 반대해도 좁은 길을,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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