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그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세상이 말하는 복과는 다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진정한 복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아니 참된 제자라면 이런 자들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의 “복(maka,rioj)”이라는 헬라어의 뜻은 ‘행복(happy), 지복(blissful)’이라는 말인데, 원래 의미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자족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육체적이거나 일시적인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누렸던 행복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그런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지 않고는 절대로 이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은 ‘부자가 행복하고, 고상하고, 우아하며, 멋있고, 화려한 사람, 유명하며, 인기 있는 사람, 자신을 높이 내세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들 것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그와는 다른 길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길이 인생에게 유일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있는 솔로몬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적인 모든 복은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 날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인생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나무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은 지구상에서 자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눅 12:15)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혼을 소유한 우리는 육신적인 것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채워져야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에서 누가복음에는 네 복만 나오지만, 마태복음에서는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마 5:3-12).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된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니 애통하는 것이요,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해지며 화평케 합니다. 이러한 모든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세상을 이기며, 핍박을 이기며,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 첫째 복인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 임이요”(20절하) 하신 말씀, 즉 가난한 자에 대하여 자세히 묵상하며 살펴보기 원합니다. 물론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마 5:3)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럼 영혼이 가난하다는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난하게 되며,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지 어떻게 알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알아보기 원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고 할 때에 사용한 ‘가난(ptwcoj)’은 당시 거지들의 모습인 ‘위축하다, 찌들다, 굽실거리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완전 밑바닥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토록 메말라 있고 굶주린 상태를 말합니다. 목말라 함을 뜻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영적으로 피폐함을 인정하는 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소망이 없고, 버려진 자로서,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았어도, 아무리 재물이 많더라도, 사회적인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종교적인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기근(饑饉, famine)상태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재간이 없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자만이나 교만은 사라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며, 그야말로 빈 손들고 주 앞에 나아감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첫째 복입니다. 영적 가난을 인정함이 진실(sincere)이라는 말입니다. 가난을 가장하거나 연기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이 정말 겸손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이런 사람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성경은 그런 사람을 “마음이 상하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시 34:18; 51:17)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들과는 달리 어떤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3-14)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심령이 부하였지만 세리는 심령이 가난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교만(pride)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성, 부, 그리고 위신(prestige) 등이 자신을 교만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고생한 모든 희생, 예식, 고행 등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을 때에야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민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 같은 왕도 겸손히 그의 자비와 능력을 구하며 죄된 모습을 진솔하게 하나님께 나타내었습니다(시 51:1,3). 그러나 지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율법을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사용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고쳤습니다. 해석에 해석을 거듭하여 육신이 지킬 수 있는 전통(tradition)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백 년을 걸쳐서 지도급의 랍비들이 율법을 주석한 것으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율법(Torah)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613가지의 규례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사람의 기준으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사람의 계명이라고 일컬었던 것입니다(마 15:9). 그 자신들은 본래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다고, 스스로 거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외적인 것을 나타내기에 눈에 보이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법은 내적, 외적인 것 모두, 즉 전인(全人)과 관련된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상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심령이 가난한 복이 제일 먼저 나왔을까요? 이유는 다른 모든 덕목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18:3-4).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만이나 교만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낮은 문이기에 높은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비어있지 않는 한 채워질 수 없으며, 정말 무가치하다고 여기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으며,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이 없이는 제자로 시작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심령이 가난하여 집니까? 절대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나 고행주의자들처럼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여 심령이 가난해져 보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육신적으로 성취하려고 하고, 작은 성취를 하고 나면 교만이 싹틉니다.심령의 가난은 오로지 진리의 말씀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죄인으로 여기는 데서, 그의 주권적인 역사로 도움을 청하면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주를 따르는 것이 제자, 성도입니다.
즉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심령이 가난하여 짐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기도로 주를 열심히 찾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주께 가까이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려고 할 때에 가난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과는 너무 대조적인, 거룩하신 하나님께 눈을 향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너무나 작은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볼 때에 겸손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물론 구하여야 합니다.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채워집니다. 부해집니다.
언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한 지 알 수 있습니까? 첫째, 나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떼어놓을 때입니다.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유는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전부다’ 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심령의 가난함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는 또 빌립보 교회에게 말하기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하였습니다. 둘째, 심령이 가난해지면 아무리 주어진 환경이 나빠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주어진 그 어떤 것도 내가 자격이 있어서 주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악한 상황에서도 더 좋지 않은 경우가 자신에게는 합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왜 내가?’라고 하나님께 묻기 보다는, ‘주를 위한 어떤 고난과 고통도 감당하리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녀이면 또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심령이 가난해지면 자신의 약함과 죄를 보면서, 다른 사람의 덕과 장점을 보게 되어 높이게 됩니다(빌 2:3). 존경하게 됩니다(롬 12:10). 내 자랑은 없고 다른 이웃들을 자랑하게 됩니다. 넷째, 심령이 가난해지면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마치 육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부한 사람에게 열심히 구걸하듯이 말입니다. 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하늘 문을 항상 두드리고 삽니다. 가난하기에 의지할 밖에요. 그리고, 심령이 가난해지면 받은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가 넘칩니다. 아마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함이 많은 사람만큼 심령의 가난함을 증명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아니면 어떤 행복과 축복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한 자들은 어떠합니까?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24절)고 하였습니다. 심령이 교만한 자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자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 자신을 믿고 사는 자들, 자신이 가진 것을 믿고 사는 자들은 나중에 화를 당하게 됩니다. 저주를 받게 됩니다.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사람들로부터 위로, 보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사시는 분들은 어떤 면에서 이미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주께 나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허락하십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주께 나오는 자들은 절대로 그 상한 심령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그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를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유는 그 때에 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심령이 가난합니까? 혹시 더욱 낮아져야 되지 않으십니까? 그리하여 정말 복 있는 자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전부이십니까? 자꾸 나를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을 더욱 알아 가십시오. 열심히 말씀을 읽고 공부하십시오. 기도에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찬양과 감사를 늘 드리고 사십시오. 그리하여 어떤 환경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맙시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사실 나는 더욱 나쁜 상황이 와도 당연한 죄인임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남을 높여 줍시다. 그들의 좋은 점들을 바라보며 격려합시다. 정말 이런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