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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12-16 (월) 06: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63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 (눅 7:11-17)


우리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와 긍휼이 있습니다. 부모가 어려움을 당한 자녀를불쌍히 여기듯이 말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뵈올 때에 “여호와께서 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신 34:6)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가 많으시다고 말입니다. 다윗도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하였습니다. 자신이 경험해보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종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9:36; 14:14; 막 1:41 등).
오늘 본문에서도 독자를 잃은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며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미 죽은 독자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 과부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11절)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대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로마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께서(1-10절) 얼마 후에 그곳에서 약 23마일 떨어진 갈릴리 남쪽 경계 지역에 나인이라는 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성문이 있을 만큼 큰 성이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12절)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나인 성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장례 행렬과 마주친 것입니다. 죽은 청년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25세가 채 안된 젊은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죽은 청년이 아니라 그 어머니에게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없는 과부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조객으로 함께 슬퍼하지만 이 어머니만큼 슬프겠습니까? 외로운 과부로서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 외롭게 되었습니다.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십니다(13절). 물론 울지 말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그녀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안아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절)고 하셨더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말도 합니다(15절). 그리고 예수님이 그를 어머니에게로 인도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장례 행렬 중에 시신이 있는 관에 손을 대는 것은 금하였습니다. 조객들에게 화를 당할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시신에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민 19:11-22). 그러나 예수님은 예외였습니다. 율법이나 사람들 위의 주권자, 권세자입니다. 조객들도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말씀으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는 능력의 주님입니다. 당연합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요 1:3),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무덤 속의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주님은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말씀하심으로 살아났습니다. 나중에 재림하실 때에도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게 됩니다(요 5:28-29).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말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죽은 청년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이 과부의 믿음을 보시고 살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이 과부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이 없습니다. 또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그 죽은 청년을 살려달라고 아무도 예수님에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독자를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것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을 살려준 것은 그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누가는 그 어머니나 친지의 반응을 기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조객들, 무리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절)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자신이 메시아 즉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심을 나타내 보이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알아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오셨습니다.
무리들은 죽었던 청년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죽은 아들이 살아나서 그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옛날 사르밧 혹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왕상 17:8-24).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가뭄으로 기근에 허덕이던 이스라엘 땅 중에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집에 거하면서 과부가 선지자를 대접할 음식이 떨어져 걱정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과부의 곡식 가루 통이나 병의 기름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계속 음식을 만들어 내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들이 얼마 후에 병들어 죽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여인이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오셨나이까”(왕상 17:18) 하니, 죽은 아들을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자기 침상에 누이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 아들이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기적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하니라”(24절)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죽은 청년을 살리시고 과부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모여 있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큰 선지자’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청년에게 직접 명령하시니 그 한 마디에 청년은 즉시 살아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큰 선지자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13절) 라고, 예수님을 주로 지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께 대한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17절)고 하였습니다. 유대 남쪽 지방까지 북쪽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능력이 알려진 것입니다.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그 능력과 영광이 더욱 퍼진 것입니다.
실제로 이후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 앞에서 여러 기적들을 행하신 후에 그들에게 명하기를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사실 예수님께서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성탄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둘째 사망, 곧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보내신 것입니다. 정말 우리들에게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인 성 과부는 남편이 없이 홀로 사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자마저 잃었을 때에 그 아픔, 고통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외로움과 슬픔이 그녀를 온통 주장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리고는 죽은 시신의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마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그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 소녀가 잔다고 하면서 소녀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마 5:41) 하셨을 때 소녀가 일어나서 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망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렐루야!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까? 하루 하루의 생활이 고달프고 힘겹고 고통스럽기만 합니까? 질병 때문에 아파하며 두려워합니까?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십시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을 믿으십시오. 그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고 하였습니다. 주님에게 나아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자를 한번도 뿌리치신 적이 없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까? 외롭습니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너무 힘드십니까?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앞에 놓여 있습니까?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우리 믿는 자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부르짖습니다. 도움을 요청합니다.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믿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그냥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들어주면 좋고 안 들어줘도 괜찮은 바램이 아닙니다. 연약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님은 그런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그 어떤 일도 하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문제로 보이지만, 주님에게는 풀 수 없는 문제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의 큰 문제들보다 주님이 더 위대합니다. 더 크신 분입니다. 아니 문제를 내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어떤 열악한 환경도 그 배후에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욥의 고백이 아닙니까?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에도 그는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절하-22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가진다면, 우리 주님이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듣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정말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게 관심을 가지시고, 듣고 계시고, 보고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안 보여도 믿으십시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한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한 우리는 다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자신에게 소망을 갖고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믿어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간절한 기도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을, 은혜를 베풀어주실 주님이십니다.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맘 아파 헤매는 그대로다 십자가 형틀에 너 위해 상하신 하나님 독생자 왜 잊었나
외로와 우는 이 그 누군가 친구를 잃은 이 그대로다 모두 널 버려도 네 죄를 속하신 주 예수 참 친구 왜 잊었나
사망을 이기신 능력의 주 네 곁에 늘 계심 왜 모르나 주 말씀 따라서 사는 이 누구나 외롭지 않으며 즐거우리

오직 주 예수만 널 돌보신다 오직 주 예수만 널 사랑해 손잡아 네길 인도하시는 사랑의 주 예수 오 하나님!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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