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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10-11 (일) 06:4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08    
말씀에 대한 반응이 중요합니다 (눅 11:29-36)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 앞에서 더러운 벙어리 귀신 들린 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 내셨더니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바알세불이라고 이름하는 사탄 마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며 고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더 보여달라고 하였습니다(눅 11:14-16).
지난 주일에는 사람이 더러운 귀신이 나간 자체로 만족할 것이 아니고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눅 11:24-26).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상태로 있다면, 마음을 비우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더 악한 귀신들이 들어가 자리잡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눅 11:28).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더 보여달라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16절)라는 것은 군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말하는 표적은 온 세상적으로 놀랄만한(extraordinary) 것을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 등 말입니다. 그보다 더 한 표적을 보이라는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마 16:1)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의 태양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든지, 밤에 달이 다른 별들과 경주하는 모습을 보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요엘의 예언인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 것을(욜 2:31) 기대하던지, 그가 손을 흔들 때에 하늘이 무지개 색깔로 변하기를 보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을 못하실 것을 기대하여, 군중들 앞에서 그가 메시아가 아님을 증명해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29-30절)고 응답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표적을 구하는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음란한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종종 결혼관계로 표현하였습니다(시 73:27; 사 50:1; 렘 3:6-10; 13:27; 호 9:1). 그들의 우상숭배와 부도덕성, 비성경적인 전통, 마음의 강퍅함 등은 음란한, 악한 사람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런 표적을 보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표적을 보이겠는데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라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이 그들이 원하는 표적을 보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계획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앗수르의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고 명하였는데, 불순종하여 정반대 방향의 지중해 다시스로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다가 배가 큰 풍랑을 만나 모든 선원이 위태롭게 되자 자신이 바다에 빠짐으로 그 선원들을 구하고, 바다 물 속의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을 있었는데, 회개하여 몸이 다치지 않고 살아 나와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던 것 아닙니까? 그 때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까?  
요나가 사흘 만에 큰 고기 뱃속에서 나와 사역을 감당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내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는 사건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땅속에서 사흘을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음부에까지 가셨다가 사흘 뒤에 부활하심을 예언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불신앙의 그들은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는 표적을 기대하거나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이상 더 큰 표적이 없을텐데 말입니다. 부활의 표적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이 메시아, 구세주임을 나타내는 마지막 표적이었습니다. 물론 유대 지도자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표적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하신 것처럼, 모세와 선지자들의 예언을 진실로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절)고 하셨습니다. 즉 이방 니느웨 백성들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백성들의 지도자와 비교를 하십니다. 자신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아주 추하고 잔인한 니느웨 사람들도 하나님 심판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며"(욘 3:5-6)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에 대한 복음의 소리를 요나로부터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통회하며 자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직접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많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거절하면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이라고 주장하며, 사랑을 입고 있다고 주장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랜 전의 니느웨 사람들이 이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절)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옛날 이스라엘 남동쪽으로 약 1200마일 떨어진 스바 여왕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기 원하고,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가지고 솔로몬을 찾아와 그를 통하여 지혜를 듣고 가르침을 받고 "당신의 하나님을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와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왕상 10:9)라고 감사하고 돌아간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메시아를 거역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얼마나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 이방 여왕도 멀리서 보물을 들고 솔로몬을 찾아와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내가 여기서 너희에게 지혜만 가르칠 뿐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 영생의 도를 선포하건만 너희는 거절하는구나. 그 여인은 초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솔로몬으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고자 스스로 찾아 왔지만, 너희는 그 동안도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축복을 입어 왔고,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너희 죄를 구속하기 위하여 초청하건만 거절하는데, 무엇을 기대하느냐?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죄(condemnation), 심판(judgment) 밖에 더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바 여왕이 정죄할 테니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올바로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복음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등불이야기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3-36절)고 하셨습니다. 언뜻 앞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눈(마음)을 등불로 비유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등불을 켜서 감추어두거나 상 아래에 두느냐, 반드시 상(lamp stand) 위에 두어서 집에 들어오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의 등불이 눈이라고 합니다. 눈이 몸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임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몸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 ‘눈이 성하다(eyes are good or clear)’라 함은 한 마음(single mind)을 뜻합니다. 한 곳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눈이 나쁘면(eyes are bad)’이라는 뜻은 등불이 숨겨있거나 상 아래 있어서 빛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점이 흐려져 있는 것입니다. 즉 빛을 볼 수 있는 눈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오히려 눈이 나빠 온 몸이 어두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나쁘면 온 몸을 답답하게, 어둡게 하는데 하물며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이는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있어야 영적인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을 고수하느라고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영혼의 눈이 밝으면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봅니다.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게 됩니다. 눈은 마음(heart)을 나타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고 하였습니다. 자기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나 등불이 등경 위에 있어 온 집안을 환하게 비추듯이, 영혼의 눈(마음)이 밝아 온 몸에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온전히 밝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들어가 온전히 밝게 함으로 어두움이 있을 곳이 없어지게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그렇게 우리의 영혼의 눈(마음)이 밝아지려면 1)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여 더럽혀진 눈을 씻어야 합니다. 눈에 티나, 먼지가 들어가면 따갑고 잘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눈물로든지, 생수로 말입니다. 눈 병이 나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약을 써야 합니다. 더 큰 병이면 수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권면하신 말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고 하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혼탁한 영혼을 치유하시는 말씀으로 영안이 고쳐지지 않으면 온 몸이 어둡게 되고 망하게 됩니다. 2) 겸손한 마음으로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야 합니다(고전 14:1).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령한 삶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1). 흐트러진 초점을 주님께만 맞추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보게 될 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영적인 눈도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나 자신도 달라지게 될 것이요, 내 주위의 세상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처럼, 솔로몬 왕에게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스바 여왕처럼, 아니 요나 보다, 솔로몬 보다 훨씬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올바로 반응을 하는 사람은 등불로 자기 몸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그 눈이, 마음이 제자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니느웨 사람들보다, 스바 여왕보다 못한 것입니다. 결국 심판이 임합니다.
또다시 강조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착해 보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며, 도덕적으로 살아서 겉으로 반듯해 보여도 다 죄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초청을 거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표적을, 기적을 아무리 보여 주어도 진심으로 자신이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느끼지 못하면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아니라도 그 책임을 나중에 져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하기에 그 죄에 대한 형벌을 영원히 치러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얻게 됩니다. 굳이 표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악한 세대나 표적을 구합니다.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 중요합니다.
심령의 눈이 밝아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를 결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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