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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10-18 (일) 08:5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81    
저주를 받을 자들 (눅 11:37-54)


신구약 성경 전체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 맨 끝까지 의롭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대변하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영적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잘못 가르치며 거짓으로 인도하는 종교적 야바위 꾼들에 대하여는 성경에서 엄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악과 거짓의 종들에게 그들의 아비가 사탄 마귀라고 선포합니다(요 8:44). 하나님의 구속 역사상 하나님의 진리와 그 역사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들이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시 권력을 잡고,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바리새인과 율법사 혹은 서기관을 정죄하며 저주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에서도 그들을 꾸짖던 예수님은(눅 6:20-26; 마 5:20; 7:15), 오늘도 그들에게 있을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무리를 꾸짖은 후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식사 초대를 하기에 기꺼이 그 집에 가서 앉으셨습니다(37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다고 합니다(38절). 여기서 말하는 ‘손을 씻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식사하기 전에 병균이 있을지 몰라 손을 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도 없는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규례로 식사 전에 물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가리킵니다.
눈치를 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39-41절)고 하십니다. 사람들 보기에 겉은 번듯하지만 속은 더럽다는 말씀입니다. 탐욕이 가득하고 음탕함으로 자신 스스로 타락해 있으니 가증하다는 말입니다. 잔과 대접이 겉은 더러워 보여도 그 안이 깨끗해야 음식을 담아 먹을 것 아닙니까? 경건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모보다 속내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싫어하는 것이 외식, 위선입니다. 속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를 받아 정결하게 되어 그런 순수한 모습으로 구제를 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싫어도 억지로 하는 구제는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42, 43, 44절)라고 하면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세 가지의 저주를 하십니다.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은 ‘이 저주 받을 자들이여’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첫째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42절)고 하셨습니다. ‘박하와 운향’은 향료를 만드는 식물들입니다. 율법의 작은 계명들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큰 계명, 가장 기본적인 중요한 계명을 무시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작은 계명들을 지키는 동기도 잘못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소득의 십일조는 성전세로 드리는 의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일조뿐만 아니라 각종 예배와 절기 등을 위하여서도 또 십일조를 내야 했습니다(신 12:11, 17). 그리고 3년에 한 번씩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 객을 위하여 또 십일조를 내야 했습니다(신 14:28-29). 그러니까 일년에 총 소득의 23% 가량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사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까지의 십일조는 율법에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사소한 소득의 십일조도 열심히 드렸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공의(justice)와 긍휼(mercy)을 저버린 것입니다(마 23:23).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도 행하여야 하지만 더 중요한 공의를 행하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보이지 않기에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이미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외적인 것을 치중하여 본질을 잃어버린 것을 꾸짖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말만 잘하는 것으로, 헌금하는 것으로 신자인 척 하지만, 세상에서 사업할 때나 직장생활하면서 속이고, 돈이 관계가 되는 것에는 탐욕으로 추한 모습을 보이며, 교만과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의 말과 행실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며, 음탕함과 사악함으로 방탕한 모습이라면 저주 받을만하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도다”(43절)라고 하셨습니다. 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지도자입니다. 회당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시장과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를 좋아하는 지도자입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모임에서 자기 생각만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전혀 양보할 줄 모르는 지도자입니다. 자신이 최고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격식을 갖추며 존경 받는 명칭인 ‘랍비’라고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마 23:6-7).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지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시장에서조차 인사 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 ‘평토장한 무덤’이란 비석도 없어서 평평한 무덤이라 아무도 모르는 무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 위를 밟아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데, 실제로는 그 아래 시체가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 같은 죄인으로서 별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영적으로 죽은 시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높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제 파악을 하고 낮아지라는 뜻입니다.

이 때에 한 율법사가 이렇게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못마땅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절)라고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자 혹은 서기관을 지칭하는 율법사가 앞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예수님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자신도 그 무리에 속하기에 모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3-4) 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말로 가르치며 행하라고 하지만 자신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는 위선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말한다면 그것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자신 스스로는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에 대한 많은 규례들을 정해 놓아 그 백성들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져 도저히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놓고는 그것을 다 못 지키는 죄책감의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자신들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고 돕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나 용서, 자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지요. 머리로만 지식적으로 알아서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영적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지요. 죄악을 멀리하고 주의 뜻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할 것을 말하여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47-48절) 하십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을 높였으나 사실 그들의 조상들은 참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즉, 실제로는 조상들이 저지른 악한 죄를 높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49-51절)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작금의 그들이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고 살거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참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똑 같은 죄를 지을 기회가 주어졌는데 후자를 택하여 똑 같이 하더라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창세 이래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히브리어 원문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하 24장 20-22절의 사가랴 선지자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저주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순교자들의 피가 다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마 23:35). 어쩌면 앞에 나온 모든 저주와 심판의 절정이며 가장 악한 그들의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핍박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저주 받을만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52절)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율법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율법을 잘못 해석하거나 마음대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 지식의 열쇠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방해가 된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해석을 하고 잘 풀어서 사람들에게 깨우칠 사명이 있고, 그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집(잠 9:1)에 들어갈 열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조차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이 땅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높아지려고 하면서 착각 속에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 지도자들이 그렇게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성경의 신적 권위나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도 믿지 않고 교회를 섬기는 이단이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입은 지도자들 말입니다. 자기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지 않고 살면서 주위의 가족이나 이웃들도 교회 근처도 오기를 싫어하게, 구원 받기 힘들게 만드는 자들 말입니다.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저주를 받을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저주하는 말씀을 하시고 그 집에서 “나올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53-54절)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고를 들었어도 역시 저주를 받을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트집을 잡고 헤치려고 길목을 지키는 그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섬뜩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다 지도자입니다. 꼭 눈에 드러나는 지도자만 지도자가 아니라 가정에서 부모로서, 형, 누나, 오빠, 언니, 사회에서 경영자로서, 직장 상사로서,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 우리는 다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된 지도자이면, 오늘 본문의 율법사(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지도자라면 주님의 저주와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고 반듯해 보이면서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그 생활에 외식과 불법, 죄악이 나타난다면 저주를 받습니다. 속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지 않으면, 성령으로 타락했던 양심이 회복되지 않으면, 변화를 받지 못하면 자기만 구원을 못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지도자로서 저주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어 구원에 이르려고 교회에 찾아왔는데, 그 사람을 지옥으로 향하도록 부패와 타락으로 인도하는 자도 저주를 받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그릇되게 가르쳐도 저주를 받습니다. 쓸데없는 논쟁에 열심을 내고 분명한 진리를 그대로 받지 못하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정말 중요한 공의와 긍휼을 무시하면서 하나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참된 주의 종을 핍박하고 미워하고 죽이면 저주를 받습니다. 제 말이 아니라 오늘 주신 성경 말씀의 내용 그대로 입니다.
사실 오늘날 그런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처럼 비판하고 경고하였다가는 ‘사랑이 없다, 친절하지 못하다, 정죄하는 것이다’ 라고 욕을 듣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 그런 잘못된 가르침이나 외식적인 행동이 용납이 되는 듯한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심한 경고를 하시는 이유는 정말 그들이 그런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는 것을 바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의 모든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듯이(벧후 3:9),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심하게 꾸짖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는 분들은 절대로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주가 임할 리가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옛 사람, 죄성이 발동하여 잠시 잠깐 이런 모습이 나타날 지는 몰라도 절대로 계속 그런 모습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내주하시는 성령님, 예수님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속에 이런 모습이 계속 보인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닙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딛 1:15-16)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믿는 자로서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모습 가운데 이런 사탄 마귀의 역사가 있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회개하며 물리치셔야 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하고 신실한 모습으로,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는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면서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삶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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