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16,012
오늘방문 : 1791
어제방문 : 2119
전체글등록 : 3,841
오늘글등록 : 2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10-25 (일) 09:1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74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면 (눅 12:1-12)


오늘날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여,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정말 신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살아가는 모습이, 말과 행동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성도’라 할텐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설교 제목에 ‘참된’이라는 형용사를 부친 것은 참되지 못한, 거짓된 제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며, 기적과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랬더니 수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에게 모여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절하)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12제자들에게 먼저 교훈하십니다. 여기 ‘주의하라’는 말은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서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누룩은 빵을, 떡을 부풀게 하는 효소로서, 성경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비유적으로 나쁜 영향을 의미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룩이 있는 떡을 갖고 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는 출애굽을 하여 나와서는 이방 애굽의 나쁜 영향을 받지 말라, 우상신을 섬기는 사악하고 음란한 모습들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식(ὑπόκρισις, hypocrisy)’ 혹은 위선은 연극하는 배우의 연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숨기고 가면을 쓰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 함은 율법주의, 형식주의로 위선, 외식이 가득한 삶의 영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 사람보다 겉 사람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외식을 주의해야 할 이유는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2-3절)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모습과 연기하는 것을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면 뒤의 모습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어두운 데서, 골방에서 몰래 말한다고 해서 못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시편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감찰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 4:5)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기에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알고 계시니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내 친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4-5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시면서 이 세상 권력으로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몸을 죽여야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 밖에 못 죽이지만 그 후에 어쩌지를 못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후에 지옥으로 던져버리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영혼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권력을 가진 사람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사탄 마귀가 우리의 몸을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우리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또 몸은 죽는다 하여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고전 15:42).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성도들이 육신의 핍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을 주장하는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지옥에 던져 넣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제자들로 하여금 주를 섬기게 하는 데 큰 동기를 부여하며, 당하는 어떤 환란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롯한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하였듯이, 제자들은 강하고 담대히 살았던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6-7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는 물론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을 주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며 돌보시는지, 그리하여 절대로 그들이 영원한 손해를 보지 않도록 지키심을, 또 다 아시고 계심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앗사리온은 당시 가장 작은 화폐의 동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하루 임금인 한 데나리온의 1/16 정도의 가치가 있는 돈이었습니다. 또 당시 구운 참새는 가장 값싼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참새 한 마리도 주께서 잊어버리지 않는다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머리카락이 얼마나 되는지 세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에 대하여는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가리킵니다. 그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알고 계신다면 하물며 우리 인생의 모든 일에 대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참새보다 훨씬 귀한 존재들이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하시며 돌보신다는 약속과 같지 않습니까? 이러한 말씀을 알고 믿는다면 무슨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한편 이 말은 문맥상 그렇게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며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하나도 없이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투명한 삶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세밀하게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이서 예수님은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8-9절)고 하였습니다. 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시인하면 천상의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를 참 제자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기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 이후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주님을 시인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제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이야말로 가장 신실하며, 진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여기 "시인하다(ὁμολογήσεω, confess)"의 뜻은 ‘동의하다, 확인하다’로, 단지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identify)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마귀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하였지만(약 2:19), 그를 참으로 시인하며 믿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인정(acknowledge)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Savior)로, 주님(Lord)으로 영접하며 믿고 시인하지 않습니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하였고, 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고 하였습니다. 참 제자는 어디에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공적으로 주님과 하나됨을 시인합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롭고 편안한 때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현재 미국 생활과 같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신자가 아니지요. 제자라 할 수 없지요. 문제는 북한처럼 신앙생활하기에 열악한 환경이나, 개인적인 환란의 시간이 닥칠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 될 때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자들이 많지만, 세상이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주고 힘들게 할 때에도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섬기겠다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베드로는 핍박이 올 때에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에는 참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을 시인하며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경외하였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의 경고인 9절 말씀은 누구든지 겉으로는, 입으로는 주님을 인정하면서도 시험이 올 때에 부인하는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잠잠하든지, 증거하지 않든지 하여 별로 드러나지 않기에 친구들이나, 이웃이, 심지어 가족들조차 의심하는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입으로는 예수를 시인하더라도 행동으로 부인하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9절 시제가 미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있을 심판을 뜻합니다. 지금은 잘 모를 수 있어도 앞으로 참 제자와 거짓 제자가 갈라질 것입니다. 아마 모든 참 목자들이 때때로 염려하는 것이 자기 양들 가운데 교회 출석도 잘 하고, 도덕적으로 살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혹시라도 참 제자가 아니라 외식하던 바리새인들처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절)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독하다’ 혹은 ‘훼방하다(βλασφημέω, blasphemy)’라는 말은 죄의 극단적인 모양을 대표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죄는 전반적이 모든 부도덕과 불경건한 생각과 행동을 대표한다면, 모독(훼방)은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악하게 말하거나 모욕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그러한 죄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레 24:16).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다른 모든 죄와 같이 그러한 모독(훼방)도 자백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말로 예수님을 거역했어도 회개하면 사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3-14)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도 예수님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을 때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였으나(막 14:71) 나중에 용서를 받고 회복되었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말이나 생각으로 죄를 짓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 지혜, 공평하심, 신실하심, 사랑과 자비 등에 의심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백하고 회개하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있는데, 바로 그것이 성령을 모독(훼방)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잘 모를 때에 말로 거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보내주신 후에 성령님께서 계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인하며 훼방하면 그 죄는 용서함 받지를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수 차례 성령님의 역사를 보여주시고 메시아임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능력이라고 고소하며 하나님을 대항하고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초점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절)고 한 것처럼, 성령님이 제자들과 항상 함께 하면서 도울 테니 권세자들이 핍박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 말을 가르쳐주실 테니 담대하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야 할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입니까? 위선을 경계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감추거나 숨길 수 없습니다.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하십시오. 정직하십시오.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십니까? 그들의 미움과 비난,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두려워하십니까? 내 몸이 당할 아픔을 두려워합니까? 영혼은 어떻게 하구요.
오늘 본문은 참된 제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질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삶을 입증해 주실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육신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고 보살피며 돌보시고 사랑하심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 27:1, 3)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가집니다. 그리고 어느 때든지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예수님을 시인합니다. 담대하게 주로 고백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진리의 말을 합니다. 얼마나 멋진 제자의 삶입니까? 오늘날 참된 제자를 보기 원하는 세상에서 이런 모습을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375 수요설교 채찍질하고 조롱하며 때리더라 (요 19:1-3) 한태일 목사 2024-03-28 2
1374 절기설교 잘못된 믿음 (요 12:12-16) 한태일 목사 2024-03-24 28
1373 주일설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막 2:18-22) 한태일 목사 2024-03-17 84
1372 주일설교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3-17) 한태일 목사 2024-03-10 175
1371 주일설교 회막을 향하여 진을 치고 (민 2:1-2) 관리자 2024-03-04 236
1370 수요설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빙 2:12-18) 한태일 목사 2024-02-29 156
1369 주일설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 2:1-12) 한태일 목사 2024-02-25 258
1368 주일설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막 1:40-45) 한태일 목사 2024-02-18 374
1367 수요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한태일 목사 2024-02-15 153
1366 주일설교 예수님의 마음은 (막 1:29-39) 관리자 2024-02-12 269
1365 주일설교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막 1:21-28) 한태일 목사 2024-02-04 369
1364 수요설교 하나됨을 지켜라 (빌 2:1-4) 한태일 목사 2024-02-01 109
1363 주일설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 (막 1:14-20) 한태일 목사 2024-01-28 117
1362 주일설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막 1:9-13) 한태일 목사 2024-01-21 147
1361 수요설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 1:22-30) 한태일 목사 2024-01-18 102
1360 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과 준비 (막 1:1-8) 한태일 목사 2024-01-14 104
1234567891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