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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4-01 (목) 11:01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180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5-46; 막 15:33-36)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는 불완전하고, 우리도 온전한 자녀인 적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부모가 되었어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 있어서 하나님은 완전하신 아버지였습니다. 우리 주님도 완전하신 아들이었습니다. 완전하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완전한 교제가 있었고,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사건이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남기신 7마디의 유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마디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이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며 채찍에 맞으신 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제일 먼저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둘째 마디는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고 한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살인강도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셋째 마디는 십자가 아래 자신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있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고 하시며, 요한에게는 “네 어머니”(28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가 아닌 ‘여자여’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육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공적인 위치 곧, 세상 죄를 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비록 육신적으로 예수를 낳았다 할지라도 죄인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제는 아들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독생자까지 주신 그 크신 사랑,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시는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제는 새로운 사랑, 하나님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오늘도 환란 중에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중에도 ‘나는 너를 안다. 너의 연약함도, 나를 향한 사랑도 다 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자비와 긍휼로 너를 위로한다’고 하시는 음성입니다. 이 긍휼을 입고 사는 우리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맺어준 하나님의 가족들에게 힘들어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세 마디의 유언을 하신 후에 세 시간 가까이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45절) 한 것을 보면, 아마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세 시간이 사흘보다 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 구시 운명하시기 직전에 네 번째 유언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일곱 번째 유언까지 네 마디의 말씀이 계속해서 십자가 상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바로 육시에 온 땅이 캄캄해져 버린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왕이신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의 사건에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축하하며 목자들 앞에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도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후에 기적 중의 기적인 부활이 있었습니다만,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6시간을 고통 중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에 일어난 첫 표적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정오 임에도 불구하고 온 땅에 어두움이 약 세 시간 가량 임한 것입니다(45절). 유대 시간으로 제 육시는 정오, 12시를 가리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때문에 검은 구름이 뒤덮여서 어두움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폭풍우가 임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기인 경우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우기가 아닌 유월절을 지키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까지 온 세상이 깜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식 현상도 아닙니다. 주권적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내리신 기상 이변이었습니다. 이 현상은 저절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적이었습니다. 이 자연의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당신의 아픈 마음을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에게로 나오도록 초청하시는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어두움 아래 행해지고 있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과, 또 그것이 어둠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임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을 때에 해도 빛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없는 삶은 단지 어두움일 뿐입니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불신앙과 무지는 죄악의 어두움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두움을 더욱 사랑합니다. 둘째 사망, 곧 지옥에 갈 영혼들입니다.

온 땅이 어두워졌을 때 십자가 상의 네 번째 유언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크게 부르짖으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절) 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고난의 절정에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부르짖음은 그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처절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한계에서 토하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진노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진노의 형벌을 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우리 주님께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며, 그렇게 가까이 지내던 아버지와의 단절을 경험하시던 그 분 영혼의 아픔을 또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끄러운 십자가에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아야 했습니까?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구원자, 구세주가 버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그 모든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모릅니다. 오히려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오셨다면 자기는 당연히 구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의 불신앙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1-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심판의 고통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혜였습니다.
즉, 사탄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십자가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고난 앞에서도 담대하시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아니하시던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갈라놓을 수 없는 하나님과 그 아들 사이를 인간의 ‘죄’가 갈라놓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함께 깨닫는 것은 오직 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지속적으로 죄 가운데 거하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신 유언의 말씀은 그냥 뱉어내신 비명이나 기도가 아닙니다. 시편의 말씀이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지옥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주님의 부르짖음은 성경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셨던 생애였습니다. 말씀으로 물과 양식을 삼으시고, 말씀으로 일하시고, 말씀으로 쉬시고, 말씀이 기도의 제목이 되었던 생애였습니다. 끝까지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즉 주님의 생애 전체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지키며, 순종함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리의 삶의 표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이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격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고, 그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은 감정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처럼 그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지기까지 거룩하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때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박한 종교적 감정일 뿐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크게 부르짖는 주님의 유언을 마음 깊이 새기고,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며, 감사와 함께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결심으로 오늘을 내일을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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