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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12-16 (목) 08:40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544    
임마누엘의 성탄 (요 1:14)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2000여년 전에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지난 주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고 말씀하신 임마누엘(Immanuel), 즉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사 7:14; 마 1:23). 아마도 성경 전체 진리 가운데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에 나타난 성탄 곧 성육신의 의미 세 가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 성탄 곧 성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합니다. 이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고 하신 말씀을 뜻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요 14:6) 영원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육신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가지시고, 죄 없으신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비록 마리아의 몸을 사용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다는 뜻입니다(마 1:20).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말입니다(요 1:18). 볼 수 없는 지존하신 창조주, 절대주권자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성육신(Incarnation) 곧 성탄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분이셨습니다, 즉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사람이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C. S. Lewis 는 이 진리를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기적 (The Grand Miracle of Christianity) 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성탄 곧 성육신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또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하였습니다. 성탄의 목적입니다. 여기 ‘거한다(skhno,w, dwell)’는 원어의 의미는 ‘천막, 장막을 치다’로 장막에 거하심을 뜻합니다. 장막 같은 인간의 몸에(고후 5:1,4; 벧후 1:3) 함께 머물고 계심을 뜻합니다. 이 뜻을 더 깊게 파악하려면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던 성막(회막, tabernacle)을 묵상하면 됩니다. 관계되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성막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하고 단단한 백향목이나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한 천막(tent)으로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설치되었습니다. 즉 임마누엘의 상징인 성막이 이제 성육신, 실제 인간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33년 동안 잠시 육신을 입고 사셨던 것은 구약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성막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에 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면, 45ft x 15ft의 크기의 성막은 1) 광야생활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그 성막(회막) 사면에 진을 쳤습니다. 성막 동편에는 유다, 잇사갈, 스불론 지파들이, 남편에는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들이, 서편에는 에브라임, 므낫세, 벤자민 지파들이, 그리고 북편에는 단, 아셀, 납달리 지파들이 진을 치고, 제사를 맡은 레위 지파가 중심에 있습니다. 성막 주위에 자리잡고 진행할 때도 항상 그 대형으로 움직였습니다(민 2장). "그 다음에 회막이 레위인의 진과 함께 모든 진의 중앙에 있어 진행하되 그들의 진 친 순서대로 각 사람은 그 위치에서 그 기를 따라 앞으로 행할지니라"(민 2:17)고 하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성막을 중심하고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진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의 삶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의 삶에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2) 성막에는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보관했던 지성소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헌장인 율법을 언약궤에 넣어 성막 지성소 안에 보관하였습니다.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육신으로 오시고, 율법 아래 사시다가, 율법의 요구대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고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고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성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록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성탄, 성육신 하신 주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으시고,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었습니다(사 53:2).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아니 제2 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성막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4) 성막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성막이었습니다(출 25:21-22).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도록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가 없습니다(요 14:6).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딤전 2:5). 5) 성막은 속죄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희생제물이 없이는 성막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짐승의 피로 제단을 적시며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이지만,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고 하신 말씀처럼, 희생제물이 없이는 죄인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갈보리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만나고 함께 계시기 위하여 광야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주셨듯이 아기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며, 이 땅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히 살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아멘!

셋째, 성탄 곧 성육신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으로 오신 것입니다.
   계속하여 14절 본문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러 온 동방박사들이나 천사들의 인도함을 받은 목자들, 그리고 천사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 그 영광을 찬양하였듯이, 주님과 함께 지내고,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이 성육신하신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체험하고,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교회 답기 위하여서는 임마누엘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쓰러진 사람들이, 죄인들이 교회에 와서 치유 받고, 죄 사람을 받으려면 이 영광을 보고,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 속에 성육신의 영광이 반사되어 비춰져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체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육신의 영광이 사라지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실 임마누엘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 나오는 이가봇의 저주처럼(삼상 4:22)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에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사회가, 그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그래도 임마누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그 나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주님의 영광이, 성육신의 영광이 떠나지 않게 하소서!

그런데 제자들이 체험한 임마누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온 세상에는 태양빛, 공기, 물 등 일반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택자들을 향한 구속의 특별한 은혜는, 사죄의 선물은 더 말할 필요 없는 귀중한 은혜입니다. 아니 이 특별한 은혜는 영생의 구원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어떤 어려움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진심으로 성육신의 예수님을 만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또한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신 이 진리, 복음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진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없이하고, 그 사탄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풀어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택자)들을 붙들어 주려고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히 2:15-16)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충만이라 함은 가득찬 상태를 말합니다. 온전히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분으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절)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 예수님 안에는 고갈되지 않는 충만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기쁨도 충만합니다(요 15:11). 그 안에 평안이 충만합니다(요 14:27). 즉 성탄, 성육신의 영광을 보면 내 안에 진정한 평안이 기름 붓듯이 부어지게 되고, 견딜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가 임마누엘의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임마누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신자입니다. 다윗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하였으며, 이어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성육신의 영광을 보고 사는 진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것을 종종 누리지 못합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이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구하지 않으면 은혜를 계속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그 선물은 구하는 자에게 부어 주시는,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은혜, 선물인 것입니다. 구하기만 하면 계속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충만한 은혜를 간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구와 함께 사느냐는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를,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한 목적으로 가지고 인생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우리와 늘 함께 하지 못합니다.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납니다. 결국은 ‘홀로’ 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 곧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의 주님은 그 이름 그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고 하신 약속 그대로 2000여년 전에 성취되었고, 오늘날까지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성탄을 축하합니다. 죄인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 역사에 한 획을 그으셨습니다. 그 분의 탄생과 함께 세계 역사는 B.C.와 A.D.로 나누어졌습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유는 임마누엘의 성탄이 사실(fact)이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시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목적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절하)고 하셨습니다. 약속한대로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의 심령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을 치셨습니다(엡 1:13).
그래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 영광으로 오신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 은혜와 진리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입으며,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주님과 함께 평강을,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원하셔서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오늘날의 성막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시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만을 경배하고, 의지하며 섬기기를 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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