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Sacraments), 거룩한 예식에는 오직 두 가지, 세례식과 성찬식 밖에는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른 예식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침을 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성경의 예식(의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제사의식도 없어지고, 제사장 제도도 예식으로서 그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의 의미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식(의식)적인 제도로서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 해질 때까지)의 의미는 사라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도덕적인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the Lord’s Day)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거룩한 예식 중 하나인 성찬식을 처음으로 제정하십니다. 옛 언약의 유월절을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바꾸십니다. 유월절은 율법이 있기 전에, 성막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절기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의 노예생활을 끝내고 출애굽할 때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과 함께 지키시는 유월절이 그 마지막으로 의미를 갖고, 다음 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옛 언약의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심을 기념하였다면, 이제 새 언약의 성찬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직접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능력을 기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첫 성찬식은 예수님이 가롯 유다에 의하여 은 30세겔에 팔리기 바로 전에 제정되었습니다. 장소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신 어느 큰 집 다락방이었습니다(12절).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14절) 한 것처럼, 유대 달력 니산월 15일 목요일 저녁 때 유월절 만찬을 하며 출애굽의 구속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절)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시간을 그렇게 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맞아 아주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나누면서, 자신이 죽고 나면 하늘의 하나님 나라에서 둘러 앉아 먹을 때까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만찬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의 구속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는데 먼저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절)고 합니다. 당시에 유월절 식사는 포도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네 번의 잔을 마셨다고 합니다. 첫 번째 잔은 이 식사가 보통 식사가 아니라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하며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잔으로서 성별의 잔(the cup of sanctifica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감사를 드리며 잔을 나누시며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의 잔은 식사 바로 직전에 마시는 것으로 기억의 잔(the cup of remembrance)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16절과 같은 맥락으로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의 천국잔치 때에 마시기 전에는 이 땅에서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 번에 포도주를 나누실 때는 천국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9절)고 하셨습니다. 이 떡은 당시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먹던 빵, 누룩이 없는 무교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떡을 감사하면서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들고 나와야 했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이제 십자가에서 찢어질 몸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녁식사 후에 계속하여 포도주 잔을 부어 나누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절)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고 하셨습니다. 이 세 번째의 포도주 잔은 구속의 잔(the cup of redemption)이라고 불리던 것인데, 마지막 최후의 만찬에서는 이제 곧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 곧 언약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찬양의 잔(the cup of praise)을 마시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유월절 의식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월절이 시내산에서 주어진 옛 언약을 기념했다면, 성만찬은 돌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쓰여진 새 언약을 기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하신 새 언약입니다. 짐승들의 피의 희생제사가 옛 언약을 인친 것처럼(출 24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새 언약을 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론에 언급하였듯이 더 이상 구약의 제사나, 절기, 예식을 하면서 기념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구속을 위한 필요충분한 수단으로 예수님과 그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죽음만을 기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곧 붙잡히실 그날 저녁에 스스로 십자가 죽음을 준비하면서 제정하신 이 최초의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무엇보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redemption)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사서 자유를 주시려고 우리가 받을 징벌을,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뿌리며, 누룩이 없는 떡을 먹으며 그 백성의 출애굽을 기념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의 피가 뿌림을 당해야 했고, 살이 찢김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이 복음을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를 이루었던 우리들이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모든 부정한 죄를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제 새 언약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옛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하였듯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새 언약을 옛 언약에 연결시키심은 그의 죽음이 옛 언약의 완성이며, 수없이 많은 희생 양들의 피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짐승의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옛 언약도 은혜로 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그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구속은 특별히 제한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9절에 성찬에 대하여 설명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너희를 위하여 주신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였듯이, 많은 사람이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피 흘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롯 유다를 위하여 흘리시는 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는 배신도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백성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대속의 은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에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가 잉태한 아들은 성령으로 된 것으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고 하였습니다.
넷째는, 그 백성들에게는 구원이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마태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9)고 하였습니다. 즉 이제 예수님은 곧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시다가 하늘 나라로 올라가시기에, 나중에 재림하셔서 아버지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그 때에 새 것으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원히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다시 만나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시 재림을 확인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영원토록 축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만큼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느니라”(요 10:29)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바로 몇 시간 후에 절대로 자신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놓고는, 공적으로 닭 울기 전 세번이나 주를 부인하였어도, 나중에 회개하여 회복시키시는 주님이셨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최초의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 징벌을 대신 받으신, 대속이었습니다. 새 언약의 시작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양을 비롯한 동물들의 희생 제물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대신 살과 피를 흘려 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시며 담대히 그 보좌에 나가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물론 제한적인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여 주심에 감사하며, 그 은혜를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4-7)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주님 다시 오시고 나서도 계속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며 보호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이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총체적으로 집약한 것입니다. 말씀으로만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제 실제로 보여주심으로 그의 교훈을 되새기고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직접 입에 넣고 씹음으로 정말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또 주님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심으로 촉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듣는 말씀만으로 은혜 체험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보고 먹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새로운 언약의 표징인 성찬식을 거행하게 하셨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하늘 나라의 포도주로 주님과 눈과 눈을 맞대고 교제할 것을 기다리는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교부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성찬은 볼 수 있는 말씀이니 말씀을 종이 위에 쓰듯 잔과 떡으로 눈 앞에 보이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성찬이야 말로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과 입으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으로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제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가 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내 죄 때문에 죽어준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도, 남편이나 아내도, 사랑하는 친구도,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죽어준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의 사랑 밖에는 없습니다. 이 사랑을 기억하라고, 이 사랑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교회(성도들)이 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 때 죄를 깨닫게 됩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헌신할 마음이 생깁니다. 주를 위하여 교회와 이웃을 섬기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귀한 십자가 죽음의 사랑을 전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바울은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함을 뜻합니다. 잔을 대하는 것이 새 언약의 표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피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언약(약속)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목숨을 걸고 이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와도 같은 우리들을, 사탄의 종으로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 중에 거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기에 그 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고난이 있더라도 자녀답게, 그리스도인(Christian)답게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생명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훗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신부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언약을 맺었는데 저버릴 수 없습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끝날까지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