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어느 다락방에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14-20절). 옛 언약의 유월절을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바꾸시면서, 성찬식을 처음으로 제정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희생할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1-22절)라고 하십니다. “보라(Behold)”고 하심은 제자들에게 놀람과 충격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신자가 그들 중에 있다고 하니 당연합니다.
그래서 다들 근심하면서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23절)고 합니다. 아니 우리들 중에 예수님을 팔아 넘길 자가 있다니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마 26:22) 하고 묻습니다. 다들 자신이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제자들은 이 시간 전까지 누가 주님을 배신하여 팔아 넘긴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문제이며, 나머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18)고, 시편 41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였습니다. 발꿈치를 든다는 말은 노새가 주인을 뒷발길질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아주 가까운 사람이 배반했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아마도 시편에서는 다윗이 그의 신복 아히도벨이 그를 반역한 것을 슬퍼하며 고백하는 말씀이었으나, 그처럼 예수님도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뒷발길질을 당할 것을 예언한 말씀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3-24)고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가롯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 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25). 아마도 가롯 유다는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아 예수님 말씀 그대로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게 은 30 세겔을 받고 팔아 넘기게 됩니다. 그들에게 자신이 입맞춤을 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말입니다. 실제 그렇게 입맞춤을 할 때도 예수님은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고 하셨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지난 주일 22장 3-6절 설명할 때 말씀드렸듯이, 가롯 유다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이 robot 를 움직이듯이 예수님을 팔아 넘겨 죽게 하시는 데에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으로 그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하신 것처럼, 나중에 자살을 하게 됩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다만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다 미리 알고 계셨던 것뿐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이 끝날 즈음에 그들 중 자신을 팔 자가 있다고 하심은, 가롯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동시에, 나중에 제자들에게 주님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더욱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큰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주님은 다 알고 있다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가 배신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제자들은 누가 큰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가 논쟁을 하고 다투게 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24절)고 하였습니다. 이 논쟁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기 전에도 있었습니다(눅 9:46-48). 그런데 또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 다가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8)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25-26절)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하십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교훈입니까? 세상의 조류와는 반대가 아닙니까? 이 세상의 독재자들, 권세자들이 그 권력으로 백성들을 억누르고, 임의로 사람들을 조정하면서(manipulate)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며 은인(Benefactors)이라고 칭함을 받으나,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권위나 힘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 달콤한 이야기로 은인이라고 자기 사람들을 만들고 조정하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절)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식탁에 앉아 받아먹는 사람이 높은 자이지만, 예수님은 식탁에 앉아서 받아먹은 것이 아니라 서서 섬기셨던 것입니다. 섬기는 자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권력, 지위, 직함, 특권 이런 것들에 대한 이기적인 관심을,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지적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 전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섬김의 본을 보였습니다. 만찬을 하시다가 갑자기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손수 대야에 물을 가지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요 13:4-5; 12-17). 또한 섬김의 도의 극치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으뜸이 되려고 하면 종이 되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원어에는 있는데, 이 구절 우리말 성경에 빠진 말이 맨 처음에 “마치(just as)” 라는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완전한 본이다. 나의 섬기는 태도가 너희들의 섬기는 태도가 되어야 하고, 나의 삶의 방식이 너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나를 본받으라. 나는 섬김을 받기 보다 섬기려 하고, 그래서 내 목숨까지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내어 주었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의 특권과 힘은 그 아래 많은 사람의 섬김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운 것과 같습니다. 자신 위에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자가 되라,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길은 종의 길입니다. 경건한 위대함은 진정한 겸손으로부터 옵니다. “섬기는 자(servant)”는 헬라어 원어로 dia,kono, 집사(deacon)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주로 집 청소나 관리, 식탁 수종 들던 종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참된 주의 종의 표시입니다. 가짜 종은 다른 사람을 위한 고난을, 고통을 피하지만 참된 종은 받아들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자, 높아지고자 함의 대가는 겸손, 희생, 섬김입니다. 힘든 곳에서, 불편한 곳에서, 외로운 곳에서, 부담되는 곳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 심지어 핍박 받는 곳에서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저 천국에서의 영원의 시간은 끝이 없이 길지만 이 땅의 시간은 짧은 것을 알고, 영원한 시간을 위하여 기꺼이 시간을 드리는,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교만하지 않지만 최고, 최선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쓴 뿌리 없이 어떠한 비난에도 우뚝 서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잘못 평가된다 하더라도 변명하지 않습니다. 자기 동정에 굴복함이 없이(자학이나 자신을 불쌍히 여김이 없이) 기꺼이 고난을 감당합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신 것을 알고, 깨닫고,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참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큰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8-30절)고 하셨습니다. 물론 동기가 잘못되었지만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을 향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음모와 백성들의 변덕에도, 거할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아도 잘 버티어 온 것처럼, 앞으로 참 믿음과 소망으로 모든 시험을 잘 통과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일을 맡겨 주시겠다고 합니다. 만왕의 왕과 함께 상에서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 곧 온 나라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천국에서의 잔치와 상급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 시간까지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어떤 시험과 고난에도 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놀라운 영광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3년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주옥 같은 설교를 들으며, 진리를 배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롯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11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너무 실망시켜 드렸습니다. 주님이 이제 곧 그들을 떠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 중 큰 자가 누구이며, 누가 더 높으냐 이런 논쟁을 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참으로 연약한 제자들입니까? 도대체 그 동안 수없이 들은 귀한 진리의 말씀들은 다 잊어버린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새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셨기에, 성령을 받았기에 그들보다는 나을까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모습이 없나요? 비록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주님을 실망시키는 모습은 없나요?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에 함께 하시는 주님에게 늘 신실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시지 전에 수석제자 베드로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5)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렇게 다들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아직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은 우리들 아닙니까? 얼마든지 오늘 오후에도 넘어질 수 있는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탄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동행하시는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며,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면 안됩니다.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주장하는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하였습니다. 이어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라고 하면서, 참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낮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치 유언하듯이 또 하신 오늘 말씀을 명심하고,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기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훗날 있을 놀라운 지위와 영광과 받을 복이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로서 마땅히 그렇게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데, 그런 섬김에 대해 복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확실히 믿고, 때로 억울함과 실망할 때도 있지만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