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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4-10 (일) 01:2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99    
저희 뜻대로 넘겨주다 (눅 23:1-25)


주일에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은 후, 로마법정인 빌라도 총독 앞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드라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만, 그 외의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전무후무한 희대의 재판을 사도 누가가 어떻게 바라보고 기록하고 있는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인지 알기 원합니다.

우선 빌라도입니다. 로마제국 황제가 지명하여 유대 나라를 관할하는 총독으로서 권력을 준 빌라도는 어찌하든지 유대 땅이 평온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집정관으로서 로마제국 동쪽 변방 유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가로서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제국 중심부에서 권력을 누리며 정치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외진 곳에서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니 유대인들이 대 로마제국 체제에 협력하면서 기본적인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 사회 특성상 대제사장들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유대인들 전체를 통제하는 독특한 종교적인 나라이기에 이들이 로마총독 빌라도나 갈릴리를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과 미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비롯한 무리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가서, 그가 백성들을 미혹하고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도 금하며, 자신 스스로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고소합니다(1-2절). 즉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가 반란을 도모하며 로마제국에 세금도 내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것 외에는 다 거짓 고소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세금을 내라고 하였습니다(마 22:21). 그리고 로마제국을 대항하여 민란을 일으킨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른 고소 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니까요. 다만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말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3절) 라고 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여기 “네 말이 옳도다”는 ‘네가 그렇게 예기한다(You are saying)’ 입니다. 긍정적인 답을 암시하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입니다.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사도 요한이 설명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는 말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왕이라는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세상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로마제국을 뒤엎는 반역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4절)고 합니다. 문제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종교지도자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무죄인 것을 알지만,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5절)라고 하니, 자신의 곤란한 입장을 모면하고자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을 듣고는 갈릴리 지역 관할 행정관인 분봉왕 헤롯에게 넘기면 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6-7절). 마침 헤롯은 유월절 및 무교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도 예수님에 대해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조롱하고는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11절). 그러자 빌라도는 대제사장들, 관원들, 무리들을 불러서 그들이 고소하는 내용의 죄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하지 못하였고, 헤롯도 또한 그렇게 하여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으니 예수님이 행한 것에 대해 죽일 일은 아니라고 설득합니다(13-15절). 그리고는 몇 대 때리고 풀어주겠다고 합니다(16절). 여기 우리말 번역에 “때려서 놓겠다(paideu,w, teach or give him a lesson)”도 원어에 의하면 ‘교훈하다’ 입니다. ‘몇 대 때려서 가르치겠다’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절충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누가복음에는 17절이 빠져 있는데 다른 공관복음에는 유월절 기간 중에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을 말하고 있기에(마 27:15; 막 15:6) 빌라도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바라바를 십자가에 처형하고 예수님은 놓아주자고 했지만(18-20절),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하며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십자가 사형에 처할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그냥 때려서 풀어주겠다고, 훈육하여 방면하겠다고 합니다(22절).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무리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23절)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25절)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목소리가 공의를 압도하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진실을 포기하고 마는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 판결로 인하여 빌라도라는 이름이 2000여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서 언제나 언급이 되는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만든 것입니다. 자신은 세번이나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고, 억울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총독으로서 가장 공정과 정의로 판단하여야 할 위치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며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마는 많은 정치적 지도자의 본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겁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요? 불의와 불공정의 다수의 목소리에 눌려서 정의와 공정을 저버리는 비겁한 행동을 한 적은 없는지요? 현재 처한 상황에서 옳은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면 손해가 나거나 해를 당할 것 같아서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없는지요? 진실을 알면서도 거짓과 타협하고 살지는 않는지요? 사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바라바와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인데 우리는 놓임을 받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 왕에 대해서도 살펴봅시다. 여기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로서 주전 4년경에 그 아버지가 죽고 나서 세 형제들이 유대 땅을 나누어 통치하였습니다. 헤롯 아켈라오, 헤롯 빌립과 함께 헤롯 안티바스로 알려진 인물입니다(눅 3:1. 19. 9:7-9, 13:31에 등장). 아버지 헤롯 대왕으로부터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의 통치권을 주후 39년까지 물려 받아 다스리던 분봉왕으로서, 부인이 있는데도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맞았기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책망을 받았고, 그 일로 헤롯 왕은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참으로 악한 헤롯 안티바스 분봉왕 앞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서는 심히 기뻐했다고 합니다(8절). 이유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라”(9절하) 였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악한 자는 이 심각한 상황에서 무슨 기적의 쇼를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주변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의 집사 구사와 그 아내 요안나는 예수님의 사역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할 때,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 8:3)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이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엘리야나 선지자 하나가 살아났다고 소문을 내기도 했습니다(눅 9:7-9). 그러니 무척 만나보기 원했던 것이며, 자기 눈 앞에서 기적을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아니 사실 그런 소문에 불안했든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고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도 했습니다(눅 13:31). 그러자 예수님이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2-33)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라고 불렀던 헤롯 안티바스 앞에서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여러 말로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9절). 상대할 가치가 전혀 없는 인물이었기에, 어떤 말을 해도, 심지어 기적을 행해도 아마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이었던 것입니다(마 7:6). 우리도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말을 해 보아야 꼬투리를 잡으며 논쟁하자고 하면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하고는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나누십시오.
직접 만나보니 예수님이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낀 헤롯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계속 고소를 하니(10절),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합니다.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11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빛난 옷은 왕이 입는 옷을 말합니다. 즉 왕복만 입은 가짜 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욕하며 굴욕감을 주기 원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소문만 듣고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기 원하는 분들은 없는지요? 주위에 믿는 자들이 있어서 여러 이야기를 주어 들었는데 믿지는 못하고 호기심에서 한 두 마디 던져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으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분은 없나요? 진실로 참 빛을 만나지 못한 분들, 아직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 말입니다. 그런 분은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적 자체보다도 기적의 주체이신 주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살펴볼 등장인물들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외친 무리들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양을 했던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돌변합니다. 어쩌면 3년 동안 예수님을 좇아다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팬들(fan club)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가 어긋나고,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군중의 심리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가만히 보면 군중은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따라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봅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는 것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는 아닌지요. 입술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나를 위한, 내 가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을 버리고 떠나시겠습니까? 아니 주님을 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잘못 믿으면 안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하면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셔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쉽게 변하는 군중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없나요? 역시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오직 하나님만, 주님만 신뢰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 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 보다 낫도다”(시 118:8-9)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믿음의 식구들도 그들 안에 있는 성령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반갑게, 웃으며 대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의 실수조차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위한 어떤 기대나 바램은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저 그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우리의 이웃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를, 진실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담대하게 받아들이시고,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수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의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셨다면, 이제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하기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로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구별하여 대처하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신 것처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늘 지혜롭고 순결하게 행동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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