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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5-15 (일) 03:3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12    
제자들을 만나주시는 부활의 주님 (눅 24:36-43)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가 아니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신앙생활이, 예배생활이 형식적이거나 피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의 감격이 사라지고, 예배를 드려도, 찬송과 기도를 드려도, 무슨 봉사를 해도 형식적이며, 그저 타성에 젖어 습관적이 되어갈 때 그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 무슨 직분을 맡은 것으로, 신앙생활 한지가 오래 되었다는 연륜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더 타락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직분이나 경력으로 따지거나, 오래 믿었다는 경륜으로 따질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감동이, 첫사랑이 식어지고, 천국 소망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큰 위기는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한 것처럼(계 3:15-16)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한, 밋밋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오늘 다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사랑이, 감격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는 장면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주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함께 모인 날은 바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함께 모인 이유는 예수님의 무덤에 이상이 생겼고,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했고, 어떤 이는 누가 가져갔다고 이야기도 하고, 뿐만 아니라 몇 여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하니, 의아해하면서도 밤에 모였는데, 종교지도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을 꼭 닫아 놓았습니다(요 20:19). 다른 사람이 못 들어오도록 말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던 선생님을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혹시 누군가 이야기하여 제자들인 자기들도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는 생각이 들자 무서웠던 것입니다. 12 제자들 가운데 이미 가롯 유다는 죽었고, 11사도와 함께한 제자들이 다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분명히 문을 꼭 닫고 잠가 놓았는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경험한 일을 말할 때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나 그들 가운데서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36절). 이것은 제자들에게 놀람과 충격 자체였습니다. 제자들이 너무 놀라고 무서워하여 유령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37절). 당시 유대전승에 의하면 유령은 나쁜 의도로 나타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말 번역에 귀신이라고 하는 뉘앙스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문을 닫아 놓았지만 초자연적으로 그 자리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이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죽어서 장사 지낸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 주님이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와 그들 앞에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니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믿을 수 있도록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신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39절상; 요 20:20).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39절하)고 하십니다. 그 때에야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고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요 20:20절하). 하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누가는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다고 하였는데(41절상), 만일 그들이 눈 앞에 나타난 그 분을 예수님과 동일시하지 못했다면 결코 기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고 깨닫게 되자 잠시 동안 마비가 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 그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고 물었고(41절하),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42-43절)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몸을 지닌 실체임을 입증하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는 신앙은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정의가 총동원되어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자 처음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을까요? 그냥 겉치레의 인사였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결코 평안하지 못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잊고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실망감과 절망감 속에 제자들이 몹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평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너희들의 불안과 두려움은 끝났다’ 라고 선포하시면서, 오히려 주님의 평강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나 혹은 가족의 질병 문제, 아니면 재정 문제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맡기고 내가 주는 평안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 승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 사람 속에 주님 주시는 평안이 넘치기 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병행구절이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그들에게 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절상)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또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 첫 번째 하신 말씀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앞으로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제자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이어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절하) 하시면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평안이 찾아오면, 그 평안으로 세상 나아가 선교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 말씀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 죽으실 때에도 다 배신하고 도망하였으며, 지금 몇몇 여자들이 주님이 부활한 것을 증거를 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 사명을 감당할 때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처럼 제자들도 이제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사도의 직분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시면서 사도의 일을 감당하도록 할 것이니,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직분을 감당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감정이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 과거에만 집착하여 있고, 자기 문제에만 빠져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새 기운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그 생각과 감정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의지적으로 세상에 나아가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주시고 다시 헌신할 수 있도록 격려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주권적으로 만나 주셨듯이, 실망한 11사도들에게도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처음에 잘 믿지 못하니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자신의 손과 발, 몸을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믿지를 못하니 생선 한 토막 음식을 잡수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며, 그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부활의 증인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 당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핍박당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당하여 마음 아파할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까닭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탄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마저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께서는 이미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만났고 성령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과 감격이 오늘도 생생하게 여러분 안에 남아 있습니까? 오늘도 주님을 만나고 있으며,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함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고 아무런 감동과 감격이 없이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피상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사모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만나 주십니다.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도 사라질 줄로 믿습니다. 평강의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래서 주신 평안으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사신다면 교회 안에서만 그 은혜와 평안으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평안으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살게 됩니다. 우리를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빛을 발하는 전등이 등을 파는 가게 안에서만 밝게 비춘다면, 소금이 소금창고에만 가득히 있다고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 주위에는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불안과 초조함으로,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실망과 좌절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평강이 흐르게 하여야 합니다.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음을 믿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세상에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평안과 자유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쌍한 이웃을 돕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휴머니즘의 인도주의, 박애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웰빙이 우선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그런 일은 많이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마 4:19). 영혼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불우한 이웃을 돕는 구제사업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근본적인 일이 아닙니다. 영혼의 문제, 죄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부차적으로 하는 일일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루지 않고 그저 부수적인 일이 우선이 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평강을 허락하셨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로 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약속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믿고 그 땅을 차지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3)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약속과 함께 복음을 전할, 말씀을 증거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갖고, 마음의 평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입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과거의 실수나 실패로 인하여 의기소침하셔서 마치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처럼 낙심하면서, ‘난 아무것도 못해’ ‘내가 무슨 전도를 해’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을 다시 만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자아를 내려 놓으십시오. 주님께서 불신앙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평강으로 채워 주셔서 사명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름을 받은 자로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선교적 삶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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