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7,888,960
오늘방문 : 866
어제방문 : 7703
전체글등록 : 3,957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8-18 (일) 23:04
분 류 주일설교
첨부#1 screenshot_20240818_at_31940e280afpm.png (1,531KB) (Down:37)
ㆍ조회: 140    
두려움 때문에 양심을 거역하는 자 (마 6:14-29)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세상이 두려워, 사람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 권력자 앞에서 핍박 받을 것이 두려워,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할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이 사형을 당하는 기사와 함께 분봉왕 헤롯도 두려움 때문에 양심을 거역하여 만왕의 왕을 배척하는 이 땅의 권력을 가진 왕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그 공포 때문에 양심을 거스리기에 심령의 혼동, 속임, 부패, 그리고 결국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아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고 하신 말씀의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은 신앙 양심대로 의로운 삶을 외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적과 말씀의 소문을 들은 헤롯의 반응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14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 사역 1년 반 정도가 지난 때로 여겨집니다. 분봉왕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기에 유대인들과 그들의 신앙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봉왕(tetrarch)이라 함은 문자적으로 땅의 1/4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으로 로마 제국 하의 식민지 한 부분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땅 보다는 훨씬 적은, 팔레스틴의 약 1/3 정도 부분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분봉왕 헤롯은 헤롯 대왕의 네 번째 부인(Malthake)의 아들이었으며, 그 아버지의 세번째 부인(Mariamne 2세) 의 아들 헤롯 빌립의 배다른 형제인 셈입니다. 헤롯 대왕은 에서의 후손으로 에돔에서 태어난 이두메인으로 10명이 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모든 유대인 남자 아이들을 다 잡아 죽였던 냉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분봉왕 헤롯은 헤롯 안디바(Antipas)이며, 그의 형제로는 아켈라오와 배다른 동생 빌립으로, 이스라엘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분봉왕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헤롯 안디바가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때는 헤롯 대왕이 이미 죽은지 30년 가량이 지난,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를 다스린지 32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갈릴리 호수의 남서쪽 디베랴에 있는 궁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그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귀신들을 쫓아내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능력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몹시 고통스러워 하였습니다. 이유는 소문을 듣는 예수님이 죽었던 세례 요한이 부활하여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인 후에 그 죄책감으로 인하여 그가 다시 살아나 자신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을 예언하였기에(말 4:5),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5-16절)고 하였듯이, 누가복음에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까닭이 주위 사람들이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부추겼던 것입니다.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 났다고도 함이라”(눅 9:7-8)고 하였으며, 이어서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눅 9:9)고 하였습니다.

헤롯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까닭을 본문 17절 이하 29절까지, 약 1년 반 전에 그가 세례 요한을 죽였던 사건을 마가가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자 마자 헤롯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죄를 지적하며, 거룩하게 살 것을 선포하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라고 광야에서 외치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반면에 헤롯은 악하고, 수치스럽고,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헤롯 대왕보다는 좀 나았으나,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중들은 세례 요한을 존경하며 받들었지만, 헤롯 왕은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세례 요한을 지하 감옥에 가두었던 까닭이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헤롯이 자기의 배 다른 동생 빌립이 로마에 여행차 떠났을 때에 그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함께 살던 아내와 이혼하였던 것입니다. 헤로디아는 아마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악한 여자 가운데 하나로, 함께 살자마자 금방 헤롯을 자기 마음대로 휘어잡고 있었습니다. 헤롯도 그렇고 헤로디아도 다 결혼한 상태에서 억지로 이혼을 하고 서로 다시 결혼을 하였기에 불법이었으며, 사실 조카와 결혼을 했으니 근친상간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세례 요한이 그 죄를 지적하였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18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기 원했지만, 헤롯은 요한을 400년 만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여기는 민중도 두렵고, 자신이 그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20절) 지하 감옥에만 가둔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은 비겁한 자도 아니었고, 자기 목숨을 건지려고 적당히 타협하려고 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할 뿐, 헤롯이나 헤로디아의 악한 모습을 보고 겁을 내어 해야 할 말을 못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할 수 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든,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더라도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바로 위대한 선지자임을 증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를 가리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절상)고 하였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죄와 싸웁니다. 세상 권력 앞에서 불의에 대하여 싸웁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나오는 담대함, 경건의 능력이 바로 베드로, 스데반 집사,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우리를 앞서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순교의 각오로 죄와 싸우던 멋진 신앙인들, 그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는지요?
그러나 헤롯은 민중을,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니 권력을 빼앗길 것 등 이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헤롯의 심중에 두 가지가 겹쳤던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20절)고 한 것처럼, 왕은 세례 요한의 설교를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한편 헤로디아는 어떻게 해서든지 요한을 죽일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본문에서 헤롯의 생일에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의 이름을 살로메라고 말합니다. 즉 헤로디아가 전 남편 헤롯 빌립과 사이에서 낳은 딸입니다. 22절에 “여아(κόρασιον)”라고 번역된 단어는 결혼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젋은 여자를 뜻합니다. 헤로디아가 그렇게 악하고, 부도덕하고, 복수에 가득찬 것처럼, 그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세례 요한을 모살하려는 계획에 그 딸을 포함시킵니다. 요즘도 그런 파티가 있듯이, 당시 이방 사람들의 생일 파티는 너무 세속적이며 부패하고 타락하여 유대인들은 그런 생일 파티를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고대 영화에서 보셨겠지만, 술 취함과 폭식, 정욕적인 춤이 난무하여 성욕을 일으키는 파티였다고 합니다. 22절에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 왕과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함은 바로 이런 성욕을 일으켰다는 뜻입니다. 술에 만취한 왕은 그 의붓딸의 춤에 매료되어 이성을 잃어버리고, 기분에 따라 하객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달라고 하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심지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합니다(23절). 이미 헤로디아는 그 남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계획이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이미 딸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왕으로서 그 딸이 달라고 하는 대로 꼼짝 없이 요한의 목을 그녀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얼마든지 내가 선물을 준다고 했지, 살인을 약속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심히 근심하였다고 26절에 말합니다. 그러나 이 근심은 죄에 대한 후회나 슬픔으로 회개에 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유대 지도자들 앞에 예수를 재판하던 빌라도 총독과도 같이 헤롯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하게 내어주고 맙니다. 자신의 명성과 자존심 때문에 어리석은 약속이었음을 시인하지 못하고 그냥 살로메의 요청을 들어주고 맙니다.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27-28절)! 소름이 끼치는 장면인데, 당시에는 보통 일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야 보아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헤롯은 분명히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는 있었고, 그의 설교를 달게 들었던 사람이었으며, 분명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나 진실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에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구원과는 관계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호기심이었지, 하나님의 진리, 죄 용서함, 사랑, 은혜를 갈망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을 두려워했으며, 군중들을 두려워하였기에 진리를,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눅 13:32)고 헤롯을 여우에 비교하였습니다. 죽음의 날이 가까워 올 때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와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신 후에 헤롯 왕 앞으로 보내어져서 처음으로 그와 대면하였는데,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지 너무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8-12)고 하였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를 보면 아이러니 하지요.
헤롯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니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배척하셨습니다. 군중을 두려워하고, 그의 명성에 금이 갈까 두려워하고, 그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 영혼은 영원히 멸망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본문 29절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마태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를 지낸 후 예수께 고하였더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마 14:13)고 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헤롯을 대면하지 않으시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헤롯 왕과 세례 요한을 비교해 보십시오. 헤롯 왕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설교도 즐길 줄 알았습니다. 기적도 기대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호기심에서 그랬겠지요. 문제는 그 마음이, 심령이 딱딱히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양심을 거역하고 복음을, 진리를 거부하였습니다. 사랑을, 자비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세상을, 사람을 두려워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정말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경히 우습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의인이었습니다.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으로 인한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죄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죄를 미워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첫 순교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 이후 사도 요한을 제외한 11 사도는 모두 순교했다고 역사가들은 전합니다. 아니 그 이후에 이러한 담대한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으며 목숨을 잃은 신앙 선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도 중국 땅에서, 북한 땅에서는 이 순교적 신앙 때문에 직장을 잃으며, 가족을 잃으며, 옥에 갇히거나, 추방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비록 자유를 잃어버리거나, 그들의 권리를 잃어버리거나, 생명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세례 요한과 같은 신앙인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세례 요한처럼 일사각오의 신앙, 순교적 신앙,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 세상을, 사탄 마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까? 오늘 본문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파괴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정말 죄를 미워하며,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신앙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말하였습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시면서 들려주시는 음성, 말씀에 순종하라는 음성,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음성,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414 주일설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막 7:14-23) 한태일 목사 2024-09-15 16
1413 수요설교 참으로 귀한 성도 (몬 1:1-7) 한태일 목사 2024-09-12 45
1412 주일설교 어떤 마음입니까? (막 7:1-13) 한태일 목사 2024-09-08 107
1411 주일설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막 6:45-56) 한태일 목사 2024-09-01 154
1410 수요설교 향기로운 예물 (빌 4:14-23) 한태일 목사 2024-08-30 99
1409 주일설교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의 능력 (막 6:30-44) 한태일 목사 2024-08-25 158
1408 수요설교 자족하는 신앙 (빌 4:8-13) 한태일 목사 2024-08-22 144
1407 주일설교 두려움 때문에 양심을 거역하는 자 (마 6:14-29) 한태일 목사 2024-08-18 140
1406 주일설교 사역(Ministry)의 원리 (막 6:7-13) 한태일 목사 2024-08-11 167
1405 주일설교 믿지 않음을 인하여 (막 6:1-6) 한태일 목사 2024-08-04 183
1404 수요설교 기뻐하라!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빌 4:4-7) 한태일 목사 2024-08-01 161
1403 주일설교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막 5:21-43) 한태일 목사 2024-07-28 276
1402 주일설교 큰 일 행하신 것을 증거하라 (막 5:1-20) 한태일 목사 2024-07-21 282
1401 주일설교 복음! 복음! 복음! (행 28:11-23) 관리자 2024-07-15 233
1400 주일설교 큰 광풍이 일어나도 두려워 말라 (막 4:35-41) 한태일 목사 2024-07-07 525
1399 수요설교 주 안에서 (빌 4:1-3) 한태일 목사 2024-07-04 434
1234567891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