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10여년 전 미국 어느 작은 타운에서 나이가 좀 든 중년의 여인이 딸이 병이 들어 급하게 의사를 찾아 만나게 하고 처방전을 받아, 딸은 집에 두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 나왔는데 너무 급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차문을 잠근 채 열쇠는 두고 나온 것입니다. 당황하면서 딸에게 전화를 했더니 딸이 어머니에게 그 약을 산 스토어에 가서 철사로 된 옷걸이를 사서 차문을 열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들어가 옷걸이를 사서 해보려고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것이라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나서 해보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와서 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했더니 자기가 나서서 그 옷걸이로 차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여인은 너무 감사하면서 그 사람에게 ‘당신은 참 좋은 분이네요’ 했더니, 그 분이 ‘저는 오늘 아침에 감옥에서 나왔어요.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닙니다’ 하더 랍니다.
여러분은 아주 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응답 받은 적이 있나요? 아니 과거에 어떤 기도응답을 받은 적이 있지요?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을 확신하고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까? 요즘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고 삽니까?
지난 주일에는 귀신들린 어린 딸을 고치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던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두로 지역에 사는 이방 헬라인 여인을 향하여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을 살펴보았습니다(24-30절). 주님을 감동시킨 큰 믿음의 모습은 1) 지은 죄를 진실로 자백하고 돌이키는 회개와 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고 확실히 주로 고백하며 경외함과, 3) 어떤 난관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께 나오는 끈질김, 그리고 4) 모든 자만, 자존심을 다 버린 겸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그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다시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31절). 데가볼리 지역은 이미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던 곳입니다(막 5:1-20). 그 사람 안에 들어있던 더러운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서 2000마리나 되는 떼가 바다에서 다 죽었던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이 지역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숫가 어딘지 정확하게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아서 모릅니다만,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한 것을 알고 사람들이 “귀 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32절). 귀머거리와 벙어리의 장애(37절)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끊긴, 소외된 삶을 뜻합니다. 홀로 외롭게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선 그 사람만 따로 개인적으로 만나십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33절상) 하였습니다. 어쩌면 마가만 데리고 만난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었으니까요.
여느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고치실 수 있는데, 왜 그 사람만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요? 이유는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보호하기 위하여서 였습니다. 혹시라도 공적으로 창피함을 느끼지 않을까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적으로, 일대일로, 개인적으로 소통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고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33절하). 치료가 필요한 데를 만지신 것입니다. 귀와 혀를 치료하겠다는 뜻입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를 고치실 때 진흙에 침을 발라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해서 보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요 9:1-11). 저는 예수님의 침에, 혹은 진흙에 무슨 치료제가 있어서 그렇게 하셨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혀에 침을 바르신 것이나, 시각장애인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바른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자기의 병든 부분을 예수님의 침으로 발라서 그 부분을 노출시키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입이 더러워서 늘 비방과 험담을 하거나 욕하고 사는 사람은 입에 진흙을 바르고, 손이나 발이 악한 자는 손과 발에 진흙을 바르고, 양심이 더러워진 자는 양심에 예수님의 침으로 만든 진흙을 바르라는 말입니다. 체면이나 위신, 자존심 때문에 침으로 만든 진흙을 거부한다면 치료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치료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내 과거의 모든 죄를, 부끄러운 부분, 병든 부분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은 사람은 그대로 살다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십니다(34절상). “탄식하다(sighed deeply)”는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깊은 애통과 한숨을 쉬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아픔으로 생각하고 그의 죄에 대해 슬퍼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에게 그의 죄를 사해달라고 탄식하며 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그가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탄식 후에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절)고 하였습니다. “에바다”는 신약성경에서 몇 군데 나오는 히브리어의 구어인 아람어 동사입니다. 마가는 그 뜻을 설명합니다. “열리라(Be completely opened)”! 귀와 입이 완전히 열리라는 명령입니다. 마귀도 순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35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분명하더라(ὀρθῶς)”는 단어가 말하다는 동사를 수식하는, ‘올바르게, 확실하게’ 한다는 부사입니다. Orthodox(correct belief) or orthodontics(correct teeth) 등에 사용한 단어입니다. 즉, 어눌했던 말이 똑똑하고 분명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잘 들을 수 있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소외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묶인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아닌지라 그가 고침 받은 것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3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널리 전파합니다. 그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칭송합니다.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37절)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면,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3-6)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예수 그리스도)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말씀들 그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탄식하시며, 그를 찾는 이마다 치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에바다” 라는 말씀으로 그 치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막힌 것이 열리고, 맺힌 것을 풀리게 하십니다.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아 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고, 우리의 귀에 그 말씀이 들리고 있는 때는 영적으로 낮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얼마든지 망가진 인생을 치료받고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영적인 밤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들을 수 없는 때를 말합니다. 또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을 억압해서 진리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 사람들은 진리를 몰라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실패한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임하고,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때가 바로 이 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절하)고 한 것처럼, 이 때를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 인생이 “에바다”의 은혜를 입고, 고침 받아 새로운 인생으로 새 출발하여야 합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을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설교 듣는 시간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내 삶이 치료받는 시간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상처와 병들고 망가진 것들을 다 꺼내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어떻게 치료를 받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말씀 한 마디로 고칠 수 있으신 분이지만 그 손가락을 귀에 대셨고, 그의 침을 혀에 바르셨습니다. 그 사람이 이 치료 행위를 거부했더라면 그는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 내려놓고 주님께 맡겼습니다.
오늘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넘치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시간은 성령이 넘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의 아픈 곳을 주님이 안수하시도록, 성령님께서 만져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다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 뛰어 들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치료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최고의 기적은 말씀이 역사하며 성령이 역사하는 참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의 것들이 역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만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가 마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말씀이 충만하고 성령이 임하여도 본인이 그 안에 담그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본문의 장애인도 만약 의심하여 주님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주님의 만져 주심을 뿌리쳤다면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수리아 군대 장관 나아만을 기억하십니까(왕하 5장). 그가 한센병이 걸렸는데 자기 집에 붙들려온 이스라엘 계집종의 이야기를 듣고 한센병을 고쳐보려고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그냥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씀만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여종이 말리는 바람에 참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한센병이 치료가 되면서 완전히 새 살이 나왔습니다. 바로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음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사실 믿음이 아니지요.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알기는 알아도 성경 말씀이 병을 고치고, 죄를 이기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이 귀머거리, 벙어리인 사람을 치유하셔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과거의 주님의 사랑과 치유를 경험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 죄의 쇠사슬에 얽매인 자들에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선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람들이 귀머거리이며 벙어리인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격을 존중하며 개인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 탄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에바다”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엡 6:17).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가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 보셔야 합니다.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교제, touch 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죄 사함, 곧 영적 치유를 받고, 육적인 치유를 받아 바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실천하여 그러한 “에바다”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