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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11-03 (일) 10:21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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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0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21)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고통 받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슬픔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위로하기 원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의 삶이 주님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기를 이 세상의 누구보다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전체의 내용이 그 백성들의 죄와 하나님을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필요로 할 때에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공생애 사역 초기에도 나타난 바와 같이“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병든 자,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랑은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세기 당시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여러분 모두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막 7:31)라고 하였듯이, 데가볼리 라는 지경을 통과하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데가볼리(Decapolis)는 현대의 골란 고원 남쪽, 갈릴리 호수 남동쪽으로 10개의 도시로 구성된 지역이었습니다. 이방 신상이 많고 그리스의 우상신들이 들끓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우스, 아덴, 아데미, Hercules 신 등등 말입니다.
이런 지역의 이방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산에 올라 앉으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7:32-37). 무리들이 특히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예수의 발 앞에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어눌한 귀머거리를 “에바다(열리라)” 하시면서 예수님이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막 7:37)고 하였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 의하면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15:31)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큰 무리, 즉 너무 사람이 많아서 사흘을 계속하여 고쳐 주셨던 것으로 말합니다. 본문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1-2절)고 하십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은 원어에 의하면‘심장이, 내장이 뒤틀린다’라는 의미로 다른 곳에서는‘민망히 여긴다’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마 9:36 등).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인간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생 고통을 겪어야 하는 육신의 질병에 대하여서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를 찾아오는 병든 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한 예수님은 매일 매일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필요한 먹을 것에 대하여도, 먹을 것이 떨어져 배고파 하는 것에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본으로 가르쳐 주신 주기도에도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는 흥분 속에서 육신이 강건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흘을 먹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긴 시간 굶주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육신이 고쳐졌다 하더라도 기진할까 그들을 그냥 보내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아마 그 산을 내려가 먹을 곳을 찾기에 힘든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3절)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디서 떡을 얻어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느냐고 예수님에게 반문합니다(4절).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물으니 떡 일곱과 생선 두어 마리가 있다고 하니, 축사하시고 제자들 앞에 놓게 하시니 약 4000명이 다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게 됩니다(6-9절).
오늘 본문의 떡 일곱개와 생선 두어(몇) 마리로 장정 4천명을 먹이신 기사를 아마 많은 분들이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너무나 유사하여서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마가가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자유주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기사입니다. 그 차이를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5000명을 먹이심                4000명을 먹이심
주로 유대인들이 체험함            주로 이방인들이 체험함
베데스다 가까운 갈릴리            데가볼리 지경
떡 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            떡 일곱개와 물고기 몇 마리
12광주리가 남음                        7광주리가 남음
봄에 잔디에서 일어난 사건            그 해 여름에 산에서 일어난 사건
사건 후에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 함        어떤 반응도 없었음

그러므로 두 사건은 비롯 비슷한 점이 많아도 확실히 다른 사건입니다. 그러면 오늘 데가볼리 지역에서 보여주신 기적이 가르쳐 주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병이어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주님을 바라보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도무지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부를 만큼 먹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4절).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자신으로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을 인정하고 주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할 때에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서 도와주심으로 비록 일곱 개의 떡과 두어 마리의 생선으로도 무리들을 배불리 먹고 남게 하였습니다.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나 가득찼습니다. 오병이어 때처럼 기적에 동참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데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일하시며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도움이 없이도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이름과 그 능력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주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주를 섬기며 그 사역에 쓰임 받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드릴 때에 우리의 필요에 넘치도록 채우심을 배웁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고 하신 것처럼, 가진 것이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였지만 놀랍게도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인지 모르지만 정성껏 가진 모든 것을 드릴 때에 돌아오는 것은 몇 수십 배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축복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일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 만이 나중에 남는 것입니다. 그것 만이 주님을 만날 때에 주께 말할 수 있는, 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베푸시는 주님의 긍휼, 무한한 그 사랑과 자비를 봅니다. 차별 없이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상급에 관계된 영적인 일이든, 매일 필요한 양식이든, 마음 아파하며 고통하는 어떤 문제든, 육신의 질병이든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에 따라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서 의지적으로 긍휼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을, 긍휼을 체험해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남에게 베풀기도 어렵습니다. 아직도 그 사랑, 긍휼을 체험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한번 마음을 주님께 열어 보십시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고난과 고초를 겪으시며, 십자가까지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랑을 경험한 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사역에 부르심을 받아 단지 사람들의 육신적인, 일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리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목적도, 영적인 삶의 목적도 우선 하나님 아버지를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향한 헌신이 진실하고, 신실할 때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도 진정으로 자아를 죽이며, 이기적이지 않음으로 주님을 닮은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교인들 가운데서도 자기 사랑과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혹은 마가단(마 15:39), 즉 가버나움 남쪽 게네사렛 혹은 막달라로 불리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 방면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사인)을 요구합니다(11절). 그러자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12절)고 하시고, 다시 배에 올라 그들을 떠나서 건너편으로 가십니다(13절). 이미 많은 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늘로서 내려오는 만나를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나타내셨습니다(요 6장). 그들의 불신의 마음에 대해 더 이상 주님이 할 수 있는 표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그들을 누룩으로 비유하시면서 주의하라고 하십니다(15절). 누룩은 빵을 만들 때에 필요한 것인데, 복음서에서 누룩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나 완악하게 굳어진 불신의 마음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빵을 만들려고 반죽 속에 누룩을 일단 넣게 되면, 그 누룩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 이하에 제자들이 배에 올랐을 때 떡이 한 개 밖에 없어서 걱정하며 의논을 하니 예수님께서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고, 마음이 둔하다고 꾸짖으시면서,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18절) 라고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본문의 기적을 언급합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절)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이미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는데,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것을 보고서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 안타깝고 한심한 것입니다. 믿는다는 제자들이 어찌 바리새인들과 별 차이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금방 잊어버린 것을 아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발 깨달으라고 명하십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인간은 너무 연약하여 반복해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6장에서 보여주신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8장에 또 보여주십니다. 진리를 깨우쳐 주시면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계속 그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십시오. 그대로 믿고 순진하고 순수하게 사십시오.
아무리 이야기해도 깨닫지 못하면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아무리 예수님이 구세주와 주 이심을 증거하여도 불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은 무궁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능력 또한 무한하십니다. 모르는 것이 없으시며, 못 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런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큰 사랑을 받으라고 초청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생수를 마시라고 합니다. 특히 지금 여러분이 큰 고통 중에 있거나, 어려운 환란 속에 있으면 주께 나오라고, 마음을 주께 드리며, 베풀어 주실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라고 합니다. 만져 주시고,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실 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하셨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신실하신 주님은 그 뜻 안에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롬 8:32).
그리하여 그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 감사를, 영광을 돌리십시오. 당연한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감사하면서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축복하십시오. 주께 도구로 쓰임을 받으셔서 여러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체험하도록, 그 사랑과 긍휼을 체험하도록 하십시오. 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허락하신 것을 정성껏 드리십시오. 시간을, 건강을, 물질을, 힘을 드리십시오. 심는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30배, 60배, 100배로, 흔들어 넘치도록 주께서 부어 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훗날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됩니다. 확실히 깨닫고, 분명히 믿으시고, 오늘도 내일도 1)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사모하며, 2)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3) 다른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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