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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해경
작성일 2009-10-05 (월) 11:3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174    
[10/04/09]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복이냐?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복이냐? (출애굽기 33:1-6) - 한태일 목사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아십니까? 우리는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그 마음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거나, 아무 이유가 없어도 그냥 상대방이 좋아서, 사랑해서 선물을 합니다. 그러나 뇌물은 고마운 마음도 아니고, 상대방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어쩔 수 없어서 선물을 하는 경우 뇌물이 됩니다. 선물을 하지 않을 경우 나중에 좋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선물이 뇌물입니다. 혹은 지금 선물을 하면 나중에 좋은 것이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하는 선물이 뇌물입니다. 그런 경우에 받는 사람도 전하는 사람의 마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 선물인가가 중요합니다. 아니 뇌물이 아닌 선물 중에도 전혀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겉치레의 선물이 있습니다. 전에 한 약속을 어쩔 수 없어서 지키기 위하여 하는 선물 등 말입니다. 어떤 종류이든 간에 전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선물 자체만 중요할 때 그것은 이미 따뜻한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아니라 차가운 관계요, 어쩌면 타락한 인간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40일이 가까이 되도록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32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든 백성들을 다 멸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소수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전에 하신 약속을 지키시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진노 중에 계셨습니다. 사실 금송아지 우상은 실수가 아니라, 그 백성들의 본심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풍요로운 삶이었고, 그렇게 살도록 해준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선물만 받으면 그만,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 따위는 관심이 없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만 받으면 되지, 하나님께서 내 삶에 관계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마음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으나,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너무 다행한 일입니다.

그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이 시간까지 행하여 온 것을 보면, 그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온 이유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를 얻고 애굽보다도 더 좋은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하니까 따라 나온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선물을 주는 분이 아니라 선물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 광야 길로 진행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가나안 땅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계명들을 주시니, 아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의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1절에서 3절 상반절까지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3절하)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약속한 복은 주지만, 선물을 주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들이 아직 목이 곧아서 하나님께서 다시금 진노하시면 그 때에는 정말 그들을 다 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만을 위하여, 선물만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불편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귀찮게 들릴 것입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는 명령이 듣기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만을 바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 2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하셨는데, 여기서 “사자”를 보내겠다고 합니다. 이 시간까지 “내 사자”(출 32:34), 혹은 “하나님의 사자”(출 14:19)라고 하실 때 대부분의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들은 그 분을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제 2위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여기 2절에서는 바로 “그 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제 2위의 하나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사자 앞에는 반드시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사자”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 가운데 한 천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천사 하나를 보내어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몰아내고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차지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어야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어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친히 그 일에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지는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래도 좋겠습니까? 그저 축복을 받으면 되지 하나님이 거기 함께 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결과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이 중요합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결과 자체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 속에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오직 결과만을 향하여 달리고 그 과정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는 삶은 그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축복, 유익이 아니라 저주요, 재앙입니다.

섬뜩한 하나님의 말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 아파하고 심히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낙심해 하면서 그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된 땅을 주겠다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선물을 준다고 하는데, 오히려 괴로워했습니다. “황송한 말씀”이라는 표현은 함께 하지는 않겠다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마음이 낙심이 되고 침체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약간의 신앙양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 가운데 약간의 순수한 신앙양심이 있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상관 없이 무조건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얻으면 그만인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몸을 단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몸에 있는 모든 단장품, 장식품을 제거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눈에 가장 거슬린 것이 이 단장품이었습니다. 이유는 금송아지 우상은 이 단장품들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단장품 자체가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언제든지 금송아지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단장품은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노예들에게 무슨 은이나 금으로 만든 귀걸이나 팔찌가 있었겠습니까? 다 애굽을 떠나오면서 전리품으로 애굽 사람들에게 빼앗은 패물이었습니다(출 12:35-36). 그런 것을 누려보지 못하던 자들이 금과 은으로 된 단장품들을 몸에 걸쳤을 때에 그 기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은근히 자기들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요, 자랑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언제든지 금송아지로 바뀔 가능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장품들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상의 소지를 없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에게 단장품들을 제거할 것을 명하셨습니다(5절). 그것부터 없애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단장품들을 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도무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끊임없이 애굽으로 향하게 하고 또 우상을 만들어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들에게 이런 부분은 없습니까? 설사 그 자체는 죄가 아니더라도 그것들이 언제든지 금송아지 우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들 말입니다. 지금은 나를 편하게 하고 기쁘게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은 없습니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장품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는 그들의 마음이 다시 가난하게 됨을 뜻합니다. 그들은 오랜 노예 생활로 살아왔기에 마음의 소원은 한번 부하게, 편하게 잘 살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나올 때에 금, 은 패물들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나왔고, 자유를 갖게 되자 자기들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믿고, 죄 사함의 체험을 한 후 이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 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는 줄 압니다. 한번 신비한 체험을 하고는 혼자 다 믿는 것처럼,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속히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남겨두시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까?(벧전 2:9하) 영적 싸움을 잘 싸워 승리하여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게 위함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은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금방 교만해져 버립니다. 노예시절을, 가난했던 시절을 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님! 저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형편이 좀 나아진다고 교만해지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한걸음 한걸음 인도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단장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외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심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심령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은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고,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저 모이면 서로 추켜 세우고, 자기 자랑이나 할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장품들을 제거한 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고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삶 가운데 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이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교를 통하여 자기 성찰을 얻기도 하고, 신앙을 통하여 자기 성취감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어느 종교학자는 인간의 욕구에 가운데 최고의 욕구가 종교를 통하여 자기를 승화시키고 종교적인 희열을 맛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이 없이도, 다른 종교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또한 많은 종교인들이 이 땅에서의 복을 빌고, 복 받기 위하여 신앙을 가집니다. 복 받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는 목적도 복 받기 위하여서 입니까? 내가 잘살고, 건강하며, 내 자식이 성공하여 이 땅에서 복 받게 하기 위하여 신앙생활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도 축복만 받으면 됩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내 자식들이 성공하면 그만입니까? 그래서 그런 복을 받지 못하면 얼마든지 하나님도 저버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단장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목적하고 신앙생활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롬 8:32, 약 1:17). 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고난과 역경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만을 섬기시겠습니까? 마치 욥처럼 내게 있는 것을 다 가져가셔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니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19) 라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상적인 복이 내게 없어도,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건강하지 않다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 믿음을 가진 분들로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말 신앙생활하는 목적이 ‘하나님이냐, 하나님의 복이냐?’ 라는 질문에 ‘하나님 자신입니다’ 라는 진심어린 대답이 여러분의 대답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멀리할 소지가 있는 단장품들을 다 제거하시고, ‘그저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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