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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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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0-03-23 (화) 08:46 |
ㆍ분 류 |
주일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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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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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10]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요 1:47-51)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으로 성경은 곳곳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기 전부터 아시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믿어지십니까? 우리의 유한한 지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아니고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진리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가 75억 가까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아주 세밀히 아신다고 합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시고 계신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하나님이기에 다 아십니다. 성경은“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4-25)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사귀어 보아야 상대방을 조금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예가 등장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빌립이라는 친구를 통해 주님에게로 와 보라는 권고를 받고, 구약성경에 박식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자기를 따라오는 안드레와 요한, 베드로, 빌립에게 나다나엘을 가리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고,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사람임을 아셨기에 제자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격이 확실하고 꼼꼼한 면이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 앞에 늘 정직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그 동안 주님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주위에 이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과거에 한번 교회에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에 새로 교회를 옮겨 왔어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분들 말입니다. 또 상처를 입을까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은혜를 사모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을 알아줄 때 마음이 열리면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난 뒤에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치료가 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상처를 받은 그와 같은 분들이 있음을 봅니다. 이 분들의 마음의 상처는 주님의 말씀만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런 분들에게 치유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까닭이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드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다나엘더러 간사함이 없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국어 사전에는 간사함의 뜻을‘간교하고 사악하여 발라맞추며 남을 속이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 의미도 간교함, 속임수를 쓰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 47절에서 예수님은 간사하다는 말과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대조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의 새 이름입니까? 야곱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고 난 후에 받은 새 이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나다나엘이 야곱 형 인간이 아니라 이스라엘 형의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말 간사하고 머리를 굴리며 사람을 속이는 데에는 일인자였습니다. 물론 어머니 리브가가 그를 편애하여 부추겼습니다만, 처음에 누구를 속였습니까?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자기가 에서인 양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이삭에게 가지고 나아가며 염소 새끼 가족으로 손에 털이 난 것처럼 꾸며서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또 나중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면서도 양떼와 염소떼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만을 자기 것이 되게 하겠다고 하면서 그를 교묘하게 속였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사람을 속이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속이는 사람은 결국 자기도 속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누구에게 속게 됩니까? 외삼촌 라반에게 속게 되고, 훗날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요셉으로 인하여 속게 됩니다. 이같이 간사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아마도 구약에서 현현하신 예수님이 천사로 나타나 얍복강 가에서 야곱과 씨름을 한 후에야 바뀌게 되었습니다(창 32:28).
여러분! 복음서를 살펴보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는 간사함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거짓되다고, 외식과 위선이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늘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말입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고 율법을 지킨다거나, 선행을 행하는 것으로 포장해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마다 있는 죄를 다 내어놓고, 자신을 진짜 죄인으로 생각하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것이 간사한 것이 없는 것이고,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가면을 벗어버리고, 진실하게 나아와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다 아시는 주님을 속인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귀어 그 사람이 간사하다고 말을 하려면 적어도 수년은 사귀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곤란한 일을 당해 보아야 합니다. 즉 경험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그 어떤 비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면서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8절에 보면 나다나엘은 주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서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를 더 놀라게 했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즉 빌립이 자기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나다나엘이 거기서 말씀 묵상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만나기도 전에 빌립이 그를 인도하기도 전에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다 꿰뚫고 계셨습니다. 이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그만 주님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 전까지는 빌립을 따라서 예수님께로 오면서 뭐 그리 대단한 분일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막상 만나보니 예수님이 자신 내면을 훤히 꿰뚫고 계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혼자 앉아 있었던 사실까지 다 알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나다나엘은 주저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주님께서는 나다나엘 자기 밖에 모르는 비밀을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자기의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전혀 가식이 없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죄를 토해내는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굉장한 축복의 약속을 그에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 마음 속에 간사함이 없고, 참 이스라엘 백성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더 큰 일을 볼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51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야곱의 꿈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하다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던 중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꿈을 꾸고 그 장소를 벧엘이라 이름하면서 제단을 쌓고 여기가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창 28:17). 즉 예수님 자신이 이제 성전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지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여기서 우리는 구약성경 야곱, 즉 이스라엘의 꿈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우리는 참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인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함으로 다 해결될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의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영국의 유명한 John Stott 목사님은 “What cancer is to the body, hypocrisy is to the church. It is also addictive”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속내를 다 꿰뚫고 계시는 주님 앞에 거룩한 두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조차, 심지어 무의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조차 전부 보시며 알고 계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경외심이 생길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조차도 주님에 대한 이 거룩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사람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만 속이면 하나님까지 속아넘어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에, 그것이 두려워서 마음에 거짓을 품다가도 포기해 버리고, 남을 속이려 하다가도 멈칫하고, 악하고 추한 생각에 끌리다가도 돌아서는 여러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진정 오늘날의 나다나엘이십니다. 성경은 “마음에 간사가 없고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 32:2)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알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전지하신 주님 앞에서 거룩한 경외심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거룩한 작업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 안에 성령님을 내주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간사해지려 하고, 혼탁해지려 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회개하도록 감동을 주시며,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참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그래도 속 마음이 간사하지 않고 진실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다나엘처럼 자주 무화과나무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찾으셔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 있는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할 때, 찬양을 드릴 때,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특별히 주목하십니다. 나다나엘이 집에 있을 때도, 고기를 잡을 때도 알고 계셨던 주님께서는 유독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가 특별히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아십니다. 주님 앞에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특별히 아시고 인정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골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마음 속을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려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는 큰 위로와 용기도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엄청난 환란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7-28)라고 하였습니다. 그 백성들의 원통함을 다 아시는,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가끔 보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는 경우를 봅니다. 실제로 정직하게 행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 설 땅이 없어 보입니다. 야곱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잘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큰 위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몰라주어도 우리 주님은 나를 알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간사한 사람들에게 손해를 당해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를 아시는 주님께서 대신 보상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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