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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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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2-04-30 (월) 05:42 |
ㆍ분 류 |
주일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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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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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따라 살면 기적을 봅니다 (요 21:1-14)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실패와 실수, 실망으로 인하여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경우,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데 믿는 우리들에게 그런 경우에 붙들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의 말씀이며, 기적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을 따라 삶으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본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21, 26)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사라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요 20:21하). 그리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산에 올라가서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마 28:16). 구체적인 사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기 위하여서 말입니다(마 28:19-20). 그러나 제자들 중 나머지는 모르겠지만 일곱은 기다리다가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갔습니다.
본문 1절에 “그 후에” 한 것은 두 번째로 나타나신 후 한 달이 넘었던 시간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하여 바다로 갔다고 생각됩니다. 1절에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바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갈릴리 지방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주후 14년에 로마 황제로 등극한 티베리우스에게 이 도시를 바쳐 잘 보이려고 갈릴리라는 이름은 디베랴라고 새로 이름을 짓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복음서에는 갈릴리 호수를 게네사렛 호수라고도 불리우기도 합니다.
좌우간 이 시대는 새로운 황제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전 세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해서 격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자신들은 아직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라고 해서 왔지만 한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으시니 언제 오실 지 모르겠지만 생계 문제나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옆에 계실 때에는 먹을 것도 다 해결해 주셨지만, 지금 옆에 없으시니 현실적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제자 둘이 함께 있다가, 베드로가 자기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합니다(2-3절).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나섭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도마입니다. 도마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시면서 나타났던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계셨고, 사정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냥 물고기 잡으러 가자 라고 하기 전에, 또 베드로를 따라가기 전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에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주님, 저희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희들을 다 보고 계시면 저희의 말을 다 듣고 계신 줄 믿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갈릴리로 왔는데 한 달이 지나고 보니 이제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도저히 생활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두 번씩이나 만나고도, 지금 주님이 옆에 있지 않으니까 자기들이 스스로 무엇인가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때에도 우리 주님은 정말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에게 사랑을 회복시키시며 은혜를 되찾게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잊어버린 채 오랫동안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로 시달리게 되면 옛 신앙이나 열정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에게 물어야 합니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함께 여섯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으려 하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합니다(3절하). 밤새 자지도 않고 고생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고생한 제자들을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4절)고 합니다. 아마 아직 날이 밝지 않고 어두 캄캄해서 예수님을 잘 몰라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 동안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제자들이 알아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은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그 곳에 나타나실 줄은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제자들은 몰라 보았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찾아 오십니다. 교회에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도, 사업체에도, 가정에도, 학교에도, 그 어디에도 찾아오십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심령에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신 줄도 모르고 우리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 흥미로운 것은 왜 제자들을 향하여 “얘들아”라고 부르시느냐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도 이 단어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분명히 아이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그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경험이 많다 해도 제자들의 모습이 어린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나이가 많은 그들에게 누군가가 애들이라고 부르면 대체 누가 자신들은 애들이라고 부르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물고기를 잡지 못한 것에 마음이 다 빼앗겨 있어서 그저 잡은 고기가 한 마리도 없다고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얘들이라고 부르시는 것도 주님의 애정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너희들은 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이제 내가 너희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얘들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이것 저것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보겠다고 엄청 애를 썼지 그래 얼마나 벌었느냐?’’얘야,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지 그래 얼마나 승진하여서 인정을 받고 있느냐?’’얘야, 시험 공부한다고 예배조차 제대로 드리지 않고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왔느냐?’’얘야, 올해는 꼭 결혼해보겠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쫓아 다녔는데 그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더냐?’’얘야, 건강해 지려고 좋은 음식만 골라 먹으며 이 약 저 약 먹으며 운동도 하는데 그래 많이 건강해졌느냐?’’얘야, 자식 하나 바라보고 이민생활에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래 네 자식들은 다 잘 되었느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얘야’라고 부르실 때에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내가 내 힘으로 살려고 바둥대지 말고, 주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절)! 할렐루야!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던졌더니 단 한 번의 그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11절 참고).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 한 마디 한 마디가 능력이요, 기적이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열심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듣고 그 말씀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하시면 오른쪽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던지라 하면 던지면 되는 것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면 됩니다.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으면 됩니다. 여기에 일체 다른 말이,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을 체험합니다. 아멘!
7절에 보면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힌 순간 사도 요한은 바닷가에 서서 말씀하신 분이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라고 말하니 역시 베드로는 그 성격대로 급하게 겉옷을 입고는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에게로 갑니다. 주님이 나타나서 말씀했다는 것을 깨닫고 가장 놀란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약 3년 전에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에 이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눅 5장). 그 때에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한 말이 기억났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이제 후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베드로도 말씀 한 마디로 자기가 상상할 수 없는 고기를 잡으시는 주님을 무조건 따르면서, 다시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다른 것에 일체 걱정하지 않고 오직 사람을 낚는 어부만 되겠다고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 3년이 지난 지금,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다시 자신 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 동안도 많은 기적으로 보았고, 최고의 기적인 부활하신 주님도 이미 두 번 만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전히 먹을 걱정을 하면서 다시 고기를 잡으러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직접 말씀을 하지 않으시지만, 베드로에게 ‘너는 그 동안 왜 그렇게 변한 것이 없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시 보자 겉옷을 입고 이제는 정말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며 주님을 향해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3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와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 동안도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건만 또 다시 내 힘으로 그물을 바다에 던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본문의 제자들처럼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하고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도 ‘얘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8절 이하에 보면 우리 주님 사랑의 세밀한 배려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육지에 우리 주님께서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과 떡으로 그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으시고, 지금 잡은 고기도 좀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먹이십니다. 얼마나 자상한 우리 주님이십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15)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주님을 확실히 믿고 살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실패를, 실수를,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것도, 우리의 지친 것도, 밤새도록 자지 못한 것도 아십니다.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침체된 것도 잘 아십니다. 그래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아침을 준비하셔서 먹게 하시고 쉬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고후 9:8)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혼자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다. 너무 좋으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면서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러면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 보면 하나님의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 재앙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판단에 따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길이요, 기적을 체험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네, 그런데 . . .’하면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를, 변명을 댑니다. 혹은 ‘좀 있다가 할게요’ 합니다. 그래서 기적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순종은 즉각적인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듣고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잡힌 고기가 정확하게 153마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일이 사실이라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마십시오. 작은 고기도 아니고 큰 고기가 153마리여서 그물이 찢어져야 하는데 찢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11절). 우리 주님께서 찢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야 제자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물이 찢어질 것입니다. 다 딴 데로 새어 나갈 것입니다. 아무리 건강에 좋은 것을 먹고 노력을 해도 병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물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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