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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6-13 (일) 02:4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27    
자기를 낮추는 자 (눅 18:9-14)



인생을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질문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세상의 많은 종교들, 철학 사상들은 그들의 기준에 맞는 도덕적인 삶으로 인간 편에서 노력하면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공을 들이고, 도를 쌓고, 의를 쌓으면 그들의 신(god)이 받아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을 지켜 자기의 의를 쌓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받아준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죄인이 노력한다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요? 노력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나름대로 열심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의 절대기준에 다다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렘 17:9)고 하였고, 욥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25:4)고 하였듯이 불가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절상) 하였고,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어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창 15:6; 합 2:4; 롬 4장).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사 53장). 믿으십니까?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재림을 기다리며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지난 주일에는 마치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끈질기게 강청함으로 한 과부의 억울함이 해결되었듯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우리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나타나기를 위하여 밤낮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세상에 이런 믿음이 있는 자를 찾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8절하).
오늘 본문에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비유의 말씀으로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높이는 자들을 향하여 교훈하십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절)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종교지도자들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의롭게 살기 때문에 의인인줄 알고 자신의 판단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꾸짖으면서 제자들에게 짤막한 비유를 들면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0-13절)고 하였습니다. 앞선 1-8절 비유의 말씀처럼, 이 비유에도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며, 또 하나는 세리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대표적인 유대종교지도자가 바리새인입니다. 세리는 그가 멸시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은 보나마나 바리새인의 기도에 비중을 두고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실 줄 여길 것입니다. 더군다나 성전에서 기도하니 바리새인들은 주로 성전에서 가르치는 자들이며, 세리는 유대 동족들에게 욕을 먹는 자입니다. 로마제국에 빌붙어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착복한다고 생각하였으니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을 위하여 십일조는 바치지만, 세리는 성전의 유지를 위해 돈을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로마제국을 위하여 돈을 거두는 사람입니다. 이런 비교를 해보아도 정말 세리는 성전에서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 자신에 관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자기는 토색, 즉 도둑질이나, 불의한 일이나, 간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기도 하며, 십일조도 하고 있으니 그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 잣대로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 특히 세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설명하며 자신을 찬양합니다. 모든 공을 자기에게 돌리고 하나님께는 하나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아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완전히 다릅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슬퍼합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하고 자신만만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합니다. 13절의 “불쌍히 여기시옵소서(be propitiated)”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단어로서 속죄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대속죄일(Day of Atonement) 단어 안에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화목제물(a sacrifice of atonement)”로 세우셨다고 하였을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롬 3:25). 그러니까 세리의 기도는 자신은 죄인이니 죄를 용서해달라는 단순한 기도입니다. 그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덮으심으로 그 진노를 피하는 것뿐입니다. 바리새인처럼 기도가 길지 않습니다. 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다고 하는 말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주장할 것이 없으며,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도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판단과 달리 예수님은 두 사람이 드린 기도에 대하여 뜻밖의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14절상)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세리이며, 저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우던 교만한 바리새인은 결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지만,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겸손히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했던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리야 말로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죄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한 것도 없으며, 율법을 지킨 것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산 것도 아닌데 예수님은 이 세리를 즉각적으로 의롭다 하였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비록 자신이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며, 도덕적으로 살았으나 여전히 죄와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없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실 것으로 착각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격언과도 같은 말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절하)고 끝맺고 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자신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추실 것이며, 자신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여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판단과 너무 다릅니다. 이 세상은 자기를 높이는 자가 높아집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낮아집니다. 그래서 자꾸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대입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는지,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바로 겸손히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고 하였습니다.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하였고,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시 14:1)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이“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은 이미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의 비유에서도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라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 받지 못합니다. 세리처럼 나는 전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공을 많이 들인다 해도 불가능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에게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구속함을 받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속의 은혜가 필요한 줄 생각하고, 겸손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처음 믿을 때에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철저히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였다면, 그 시간 이후로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항상 계십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만 아니라 계속 역사하셔서 우리를 낮추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힘들고 어려운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도 대부분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주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우리는 자꾸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자만이, 교만이 또 고개를 들고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좀 했다고 해서 주장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바리새인처럼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면서 당연히 하나님에게 복을 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배를 빠지지 않는다고, 십일조를 한다고, 좀 착하게 산다고, 누구를 도와준다고 바리새인처럼 자랑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들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할 것을 하고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새벽기도를 매일 드린다고, 나가서 전도도 한다고, 구제도 많이 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한다던가, 그러니까 나를 축복해야 한다고 하나님에게 떼를 쓰면 곤란합니다. 다른 사람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나는 새벽기도도 할 수 있고, 전도도 할 수 있고, 구제도 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의 큰 잘못 중 하나가 세리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잣대로 비교해보니 자기는 훨씬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자기는 여러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데 세리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데 말입니다. 그는 세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판(판단)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판단)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판단)하는 그 비판(판단)으로 너희가 비판(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같은 교훈을 하였습니다(롬 2:1, 14:10).
이렇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교만이지만, 또한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교만의 일종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는 아들과 딸인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고 학대를 하는 것도 너무 자신을 높게만 생각하다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다 다르게 지으신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나름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감사하는 것이 참으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 비교해야 할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가 생각하면서 그 믿음을 좇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C. S. Lewis 는 그의 유명한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은 믿음, 소망, 사랑, 지혜, 믿음, 상식까지도 모두 먹어 치우는 영적 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매 순간“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를 좋아하시고, 나중에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 대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저 감사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비록 진리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주시지만, 여전히 죄성을 지신 죄인임을 기억하시고 늘 주 앞에 나올 때마다 그저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하십시오. 사죄의 은혜는 물론 더 큰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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