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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1-16 (일) 02:3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604    
세례 요한처럼 (마 11:7-15)


새해가 되어 ‘주님 주시는 평안과 소망으로 선교적 삶을 살자’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전심을 하나님을 찾음으로 만나 주심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심을 경험해야 선교적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선교적 삶을 살다가 간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세례 요한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의 삶을 나누기 원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11절에서 예수님이 그를 굉장히 칭찬하였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가리켜 큰 이(위대한 자)로 인정하신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인격을 보고 위대하다 하십니다(7-8절). 어떤 인격입니까?
1) 그는 자신의 약점을, 문제점을 극복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능력은 11장 2-3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 문제점 혹은 어려운 환경 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이 세상 누구나 죄인이기에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갈라 놓는 것은 그 문제를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 태어나고 나실인처럼 구별되이 살며(눅1:15),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지만(마 3:15-16), 또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외쳤지만 어려운 문제들에 부딪쳐 있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몸이 자유스럽지 못하게 옥에 갇힌 것이나, 불완전한 계시의 말씀, 아직 성취되지 못한 기대 등으로 의심 속에 제자들을 예수께로 보냈던 것입니다(마 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혹은 군중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여,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까지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의 일생에 위선적인 삶은 없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위장하거나 자기를 기만하는 자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진리의 말씀에 대하여 분명하지 않을 때에 그것을 확실히 알고자 하였습니다. 겸손히 자신의 부족을 인정할 뿐이지,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은 참으로 위대한 자를 경시합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도 않으려 하고, 그 문제들을 다루려 하기를 거부하는 교만한 자는 위선자요, 결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위대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진실로 겸손합니까? 자신의 약함을, 문제를 인정하고 솔직히 주께 나오며, 그것들을 주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려고 합니까?

2) 그는 주께 대한 강한 신념이,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대하여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7절) 라고 하셨습니다. 약한 신념(conviction)을 가진 자는 의심하기를 꺼려합니다. 잘못 믿고 있었다면 고쳐야 할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의 주께 대한 강한 신념은 공공연한 장소에서도 수치심을 뒤로한 채 담대히 묻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리들 앞에서 지금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것을, 세례 요한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주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신앙을 가진 자가 있다면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앞에서도, 아니 헤롯 왕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심지어 옥에 갇혔어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자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하여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가 아니었습니다(약 1:8). 세상 풍조에 요동치 않는 자였습니다(엡 4:14).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주께 대한 강한 신념이, 부동의 신앙 지조와 절개가 있습니까? 비록 때때로 의아심이 일더라도 말입니다.

3) 그는 자신(자아)를 부인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8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만족케 하는 자는 부드러운 옷을 입습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려 합니다. 편안한 삶을 택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야생꿀)을 먹으며 살지 못합니다(마 3:4). 당시의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을 섬기며,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 줄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쉽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중세 수도원의 수도승들처럼 금욕주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자아(ego)를, 죄성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자신의 믿음의 성숙을 위하여, 영육간의 훈련을 위하여 말입니다.
위대한 장군은 그의 군대와 함께 생명을 같이 합니다. 위대한 운동 경기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훈련에 임합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중대한 발견을 위하여서 자신의 건강에 모험을 걸고 연구합니다. 위대한 의학자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려고 죽을 병에 자신을 노출합니다. 결코 쉬운 길은 가려고 하는 사람은 위대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아를 부인하고 사십니까?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깎는 아픔이 때때로 요구됩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내 자신을 쳐서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인격을 보고 위대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며, 주께 대한 강한 신념으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는 인격이었습니다.

둘째는, 특별한 부르심 때문이었습니다(9-11절).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9절)고,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의 직분은 모세 때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까지 약 1100년을 이어오다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의 암흑의 공백기간을 지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셨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위대함은 자신을 부르신 그 부름에 감사하며, 늘 부족함이 없도록 충성을 다할 때에 나타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만큼 그렇게 위대해질 수 있는 잠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합당한 은사를, 재능을 주시고, 성령께서 도우시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지요. 세례 요한은 그 부르심에 최선을 다했기에 칭찬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라기서 3장 1절을 인용하시면서,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라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0-11절)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너무나 잘 감당하여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는, 즉 영의 세계에서는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의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이 큰 기업이, 더 큰 칭찬이 있다고 하십니다. 선교적 삶을 살라고 특별히 부르심에,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할 때에 주시는 칭찬입니다.
여러분을 부르셔서 믿음을 주시고, 그 사명을 주시는 것 자체가 여러분이 위대한 자가 되는 기본(basic), 기초(foundation)입니다.

셋째는, 그가 능력 있게 해낸 일의 결과 때문입니다(12-14절).
사람이 놀랄만한 인격을 가지고 있고, 놀랄만한 부르심의 사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의 위대함을 나타내려면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중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에 사역을 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그마치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무하였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역사와 예언의 한 획을 긋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를 하였을 때에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심지어 왕으로부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인내하면서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영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침략을 당하여 때때로 부인되고 거절당하게 되어 있어,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세례 요한을 욕하였으며, 헤롯 왕은 그를 고문하고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곧 순교하고, 이어서 예수님도 곧 십자가에 죽고 맙니다. 사탄은 오늘날까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천국에서 빼앗아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승리하는 자가 성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확신케 하시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좁은 길이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3-14절)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의 모든 예언이 세례 요한까지 라고 지적하면서, 구약의 마지막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이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 4:5-6) 고 주신 말씀을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즉 세례 요한은 죽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강림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예언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외적으로는 다르지만 내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열매를 내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가 큰 이, 위대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된 사명은 바로 생명의 빛, 참빛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요 1:8). 모든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선교적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순교로 삶을 마감했습니다만, 정말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세례 요한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격은 본받을 만합니다. 자신의 약함, 문제점들을 극복하며, 주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부인하였던 인격은 배워야 합니다.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결국 하나님께 열매로 영광을 돌리고, 주께 칭찬을 들었던 그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미시는 가장 위대함은 세례 요한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는 특별한 시대에 독특한 자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에 의한 새 언약이 주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한 획을 그은 자였습니다. 오늘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의 위대성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반면에 새 언약 안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의 영적 나라에 들어간 우리들은 더 위대하다고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가장 위대한 자는 참빛 예수님을 증거하는 선교적 삶을 사는 자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하며, 주님에게 대한 신념, 신앙이 확실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함의 인격이 형성되고, 사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불러 주셔서 주님을 증거하고 살라는 사명을 주셨으니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선교적 사명 감당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초림을 예비하는 자이었으나,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명 잘 감당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 위대한 자로 훗날 주님 앞에 설 수 있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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