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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12-13 (일) 09:3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81    
인간을 자유케 하시려고 오신 주님 (눅 13:10-17)


어떤 사람들은 일을 중심하고 사는가 하면, 법과 원칙을 중심으로 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든, 법과 원칙이든 다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일하고, 공동체나 사회가 법과 질서를 지킴으로 혼동을 피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나, 법이나, 원칙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반대로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잃어버리고, 율법에 갖가지 규정, 규례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 법들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고치고, 회복시키고, 살리기 위하여 율법이, 언약의 말씀이 주어진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 23:3-4)고 하였었습니다. 여기 ‘무거운 짐을 묶어 어깨에 지운다’는 말씀은 당시 나귀나 낙타에게 짐을 너무 많이 지워서 움직이기가 정말 어려운 상태를 빗대어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즉 그들은 백성들에게 많은 규칙과 예식을 정해 놓아 그 백성들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져 도저히 움직이지도 못하게 해 놓고는 그것을 다 못 지키는 죄책감과 좌절의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한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고 전혀 돕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때가 되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종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신 후에(눅 13:1-9),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시며 말씀을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10절).
누가는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합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빠져있는데 헬라어 원어에는 11절이 “그리고, 보라(καὶ ἰδοὺ, and behold)”로 시작합니다. 즉 “보라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고 하였습니다. 18년을 귀신들려 사로잡혀 등을 펴지 못하고 꼬부라진 상태로 살아온 여자를 예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2-13절)고 하였습니다. 악령으로 말미암아 18년 동안 앓으며 등이 꼬부라진 채 참담하게 살고 있는 여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여기 “놓였다(ἀπολέλυσαι, set freed)”는 동사는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의 과거완료 시제로 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안수하시자 이미 치유가 된 것이었습니다. 거저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그녀에게, 고쳐달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그저 불쌍히 여기시고 일방적으로, 주권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사람을 고치고자, 살리고자, 자유하게 하고자 하는 주님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은 여자와는 달리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14절)고 한 것입니다. 당시 회당이 여러 곳에 있었고, 회당장은 회당에서 있는 모든 예배를 주관하는 자로서 주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이 회당장도 18년 동안을 참담하게 살아온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보다, 단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사실에 시비를 걸며 무리들에게 가르치듯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이 주장하는 논리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일이니 율법을 범한 것이 되니 안식일 외 6일 동안에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한 일은 여자에게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시며 안수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인가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보다도 그들의 종교적인 전통, 법, 원칙, 고정관념을 내세우며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못하고, 모인 무리들 가운데 고침을 받기 위하여 온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물론 간접적으로 예수님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이죠. 어쩌면 열등감이나 권위의식으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그런 회당장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5-16절)라고 하십니다. 그들도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 등 가축이 목마를 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어찌 사람을 살리고 고치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느냐는 말씀입니다. 18년 동안이나 사탄 마귀에게 매였던 아브라함의 딸을 그 매임에서 풀어주는 것은 너무나 합당하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것이 주님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들은 가축에 대하여서는 안식일에 대한 규례를 관대하게 적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짐승들보다 훨씬 존귀한 인간을 살리고, 고치는 일에 대하여서는 전혀 자비도, 융통성도 없으니 외식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미 누가복음 6장 1-11절에서 안식일의 주인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었습니다. 그 때에도 안식일에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필요한 것을 지적했는데, 본문에서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딸,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악령에 시달려 18년을 고생하였는데 안식일, 즉 쉼을 얻는 날에 고쳐주는 것이 얼마나 당연합니까? 사탄 마귀를 물리치는 날로 안식일을 선택하는 것이 다른 6일보다 훨씬 의미 있는 날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축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17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역하며,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할 뿐이었습니다. 아니 계속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무지함을, 고정관념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행하신 영광스러운 일에 대하여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병이나 귀신 들림에서 자유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기뻐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후면 다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성탄의 계절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을 기념하며 찬송하는 날들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인간을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유입니다(요 1:14).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면, 말씀을 경험적으로 알면, 믿으면 자유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귀한 것이 자유입니다. 우리 인간이 개나 돼지 같은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 즉 노예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 노예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언제나 발과 목에 쇠사슬을 매어 놓았습니다. 노예들은 오직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의지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인의 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노예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매를 맞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립니다. 또 만약 노예가 아이를 낳으면 주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라면 팔아버립니다. 마치 집에서 키우던 닭이나 개, 염소를 파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1941년 1월 6일 미국 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자유를 언급했습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는 미국을 이 네 가지 자유를 충분히 누리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쩌면 그 이후로부터 미국은 이 자유들을 누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 네 가지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기나 물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유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네 가지 자유들을 누리기 위하여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근본적인 자유입니다. 바로 영적인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죄의 권세, 사탄, 마귀들로부터의 자유,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 성령과 악령이 치열하게 전쟁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려서 알듯이, 오늘날 온갖 악의 세력이 얼마나 무섭게 사람들을 죄의 소굴로 끌고 가는지 뉴스를 보기만 하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죄의 쇠사슬에 묶여서,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이 쇠사슬의 고리들 중에는 탐욕과 미움, 불안과 시기심, 두려움과 의심, 저주 등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늘날이 옛날보다 더 잘 사는 것 같고, 많이 편리해진 것 같아도, 앞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언급한 자유들을 누린다 하여도, 죄의 쇠사슬을 벗지 못하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고 하면 참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희희낙락하고 산다고 해도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핵 폭탄이 아닙니다. 죄입니다. 자연을 망가뜨리는 공해가 아니라, 죄의 공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가 이 참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역사적으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제국의 종살이를 해 보았고, 그리고 예수님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종살이를 하고 있지만, 회당장과 같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요 8:33). 그렇게 나라적으로는 식민지의 종살이를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4-36)고 하였습니다. 여기 죄를 범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실수로 죄를 짓는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Life style or pattern)가 죄 가운데 거하는 믿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 자들은 죄의 노예이기에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없지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이 아니기에 영원히 거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자유하게 하면 참으로 자유를 누린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살펴보았듯이, 한번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사 61:1-2)!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포로된 자들과 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주로 받아들인 자들은 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그 어떤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왜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계속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까? 참 믿음이 아니던가, 아니면 잘 몰라서, 깨닫지를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 . 그(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 .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 . 죄에게서 해방이 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6-7, 10-11, 14, 1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아!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었구나. 죄의 쇠사슬에서 풀렸구나. 죄에 종이 아니라 이제 의의 종이 되었다’ 라고 여겨야 합니다.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이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죄의 권세로부터, 사탄 마귀로부터 자유함을 얻으신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에, 자유하게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일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이 있는 이유도 이 일 때문입니다. 목적이 바뀌면 안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면서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면, 영혼을 죽인다면 외식한다고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신, 우리를 먼저 자유하게 하신 목적을 따라 예수님을 본받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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