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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4-08-25 (수) 01:2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3062    
[8/22/04] 사람을 세우는 사람
사람을 세우는 사람 (느헤미야 7:1-4)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차에 관심이 있습니까? 옷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먹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각종 스포츠나 취미 생활에 대부분의 관심을 쏟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돈 버는 일에 대부분의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저는 믿기로 참된 성도는 그런 데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자로 세워주려는 데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성벽 재건을 마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합니다. 특히 7장 1절에 보면 “성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라고 합니다.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제사를 수종드는 자들입니다. 즉 제일 먼저 세운 사람들은 성전을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섬길 자들을 세웠습니다. 느헤미야가 처음에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물이 중요하다고 해서 수문부터 중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통과해야 한다고 마문부터 중건한 것도 아니었고, 배설물을 치우는 분문부터 중건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사할 때 쓰이는 양들이 통과하는 양문부터 세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까? 예배의 회복의 중요성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벽 재건을 마치고 나서 일군을 세울 때에도 누구를 먼저 세웁니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할 문지기와 노래하는 이와 레위인부터 세웁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청교도 역사를 공부해 보면 왜 미국이 이렇게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먼저 드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목사로 바치겠다고 서원하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식 중에 제일 똑똑한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왜 장남을 신학교에 보내고, 가장 똑똑한 아들을 목사로 만들었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울 때에도 마을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세웠고, 추수한 뒤에도 제일 잘 익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상이라도 하시듯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이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그 동안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에도 힘을 써 왔지만,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치는 마음 만은 아직 미숙한 것 같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는 길은 가장 좋은 것, 가장 좋은 시간, 가장 좋은 인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가 이제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수산 궁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자신을 대신하여 예루살렘을 다스릴 두 명의 지도자를 세웁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느 7:2)! 두 명의 지도자 중 하나는 느헤미야의 동생이고 또 하나는 하나냐라는 관원이었습니다. 동생은 수산 궁에 있는 느헤미야에게 처음으로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려준 사람이었습니다(느 1:2-3). 느헤미야는 동생에 대하여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는 반면, 하나냐에 대하여서는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고, 그 인물의 됨됨이를 요약하여 말합니다. 여기 ‘충성되어’ 라는 의미는 ‘믿음직스러운, 신실하여, 정직하여’ 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세우되 그러한 사람을 세우는 느헤미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두려워하는 데에 무리들 가운데서 뛰어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무엇으로 무리들 가운데 뛰어납니까? 부디 신실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무리 가운데 뛰어난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통하여 큰 일을 이루십니다. 교회의 능력이 약화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없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들이 없어지면 교회가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경외하는 자들이 생기면 교회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시면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 보기에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능력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무서운 사람은 하나님을 귀하게 여고, 경외하는 자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미련한 사람들만 골라서 쓰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 지혜 없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지혜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적으로 강하고 지혜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안 쓰시더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12제자들이 과연 세상적으로 볼 때에 지혜있고 대단한 자들이었습니까? 분명히 그 때에도 뛰어난 자들, 똑똑하다고 하는 석학들, 권력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작 택한 12사람들은 무식한 자들이요,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 간을 훈련시키시고,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게 됨으로 크게 쓰임받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즉 세상적인 잣대로 보기에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고 세우시며 축복하십니다. 하나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성벽을 재건하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냐와 같이 충성되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무리 가운데서 뛰어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에 대하여 한번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4절을 보시면 “그 성은 광대하고 거민은 희소하여 가옥을 오히려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에 예루살렘은 황무지였습니다. 황폐한 땅이며, 불타버린 성벽의 잔재만 있었습니다. 인구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을 그렇게 크게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크게 지었습니다. 성이 광대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보다 앞서 스가랴 선지자ㄹ르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크게 부흥시킬 것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슥 8:3-5). 머지않아 사람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성벽을 크게 건설했던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맞게 적당한 크기로 재건할 수도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이 융성해질 그날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실 부흥을 바라보며 훨씬 더 큰 성벽을 재건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현실을 근거로 재건한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근거로 세운 성벽이었습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을 자꾸 우리 자신의 그릇 크기로 제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작은 꿈에 만족하거나 안주할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을, 사고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작은 교회를 통해서도 큰 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또한 공동체 전체적인 비전을 크게 갖는 것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도 큰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비전이 있어야 그 사람을 세울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 있는 큰 가능성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 속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일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두려워할 줄 알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비전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노아가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오늘 느헤미야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부흥케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에 큰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하였습니다. 비전을 보고 움직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현실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본문 7장 5절-73절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성경에 이런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기억될 명단이기 때문입니다. 명단은 여러 모양으로 중요합니다. 느헤미야와 그 지도자들이 이 명단이 있었기에 적절한 사람들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고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에도 명단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일군이 누구이며,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이 나오는 사람은 누구이며, 양육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하면 교회의 사역도 그만큼 명확해 집니다.
더 중요한 명단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명단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한대로 하나님과의 분리, 관계 단절, 사람과의 걸끄러운 관계, 수치심, 고통 등의 사망을 이기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지 못하고, 구세주로 모시고 살지 않는 사람의 이름은 이 생명책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죽거나, 예수님 재림하시면 그 때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에 동참한 사람들과 재건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사람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명단에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그 이름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을 세우고 계십니까? 사람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한 영혼에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신실하게, 정직하게 경외하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세우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며, 경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사람의 시각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고 결정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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