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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5:1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3353    
[7/9/06] 쓰임받는 그릇
쓰임 받는 그릇 (사도행전 9:10-19a)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가장 느낄 때가 그가 속한 곳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인정 받을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귀하게 여김을 받고, 쓰임 받는 존재, 없어서는 안될 존재임을 알 때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사업체에서든, 지역 사회에서든, 교회에서든 속한 공동체에서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잘 감당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될 때에 살아 숨쉬며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택하여 구속하여 주실 때에는 그릇으로 만드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하였습니다. 또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 18:6)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1) 라고 유대인들에게 외쳤던 것입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셔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그를 부르시어 회심하는 장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를 부르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사명이 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9:6). 오늘 본문 15절에도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그런 택한 그릇임을 가르쳐 주는 또 다른 도구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사용하십니다(10절). 5장에서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거짓말하다가 죽은 삽비라의 남편과 동명이인입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다메섹으로 피하여 온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훗날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사도 바울을 세워 사명을 깨우쳐준 제자입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 쓰임 받은 제자였습니다. 어떻게 아나니아는 주님의 쓰임 받는 그릇이 되었습니까?

첫째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습니다(10절). 환상 중에 주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응답하였습니다.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10절하) 하였습니다. 지난 주의 사울처럼 영의 귀가 열림으로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습니다. 오늘날 그 때처럼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시지는 않아도,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즉 아무리 사방이 다 막혀도 주님과 교제 라인, 그 통로 만큼은 열려 있습니다. 자주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아니 세상의 많은 소리가 있어도, 별별 소리가 다 들려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여 소중하게 듣고, 또 하나님께 자신과 가정과 교회의 사정을 아룁니다. 그러한 교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바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13-14절).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합니다(11절). 그러자 이 사울이 어떤 사람인줄 알았던 아나니아는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13-14절) 라고 합니다. 즉 그는 사울이 다메섹에 와서도 성도들을 핍박할 것을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해를 입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교회를, 성도를 아낍니다. 비록 그들이 못나고 연약하여 실수할 때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게 행한다 할지라도, 지난 주에 사울의 회심 사건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핍박하는 것은 곧 주님을 비난하고 핍박하는 것과 같기에 그들을 감싸고 아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이지요. 주님의 피를 나눈 형제우애이지요.

셋째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17절). 비록 자기 마음에 맞지 않고, 자기 생각과 달라도 주께서 하라고 명하시면 순종합니다. 아나니아가 알고 있는 사울은 성도를 핍박하는 못된 사람이지만, 주께서는 그가 변하여 택함을 받은 주님의 그릇이라고 하기에 그저 순종합니다(15-16절). 주님 말씀 앞에 편견과 가정(presumption), 자기 사고방식 등을 내려 놓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절) 합니다. 즉 아나니아로 말미암아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성령으로 충만하여지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진 것입니다(18-19절상). 비록 한 때는 원수요 대적인 관계였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것을 인정하고,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러해야지요. 그리스도 안에 무슨 인종과 신분과 성별과 빈부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내 의견, 내 생각, 내 고집, 내 교만을 다 내려놓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이렇게 쓰임 받는 그릇(아나니아)이 또 다른 한 택한 그릇(사울)을 세워 그도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여 구원해 주시고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한 교회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게 하신 것은 과실, 즉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전도의 열매를, 제자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시고, 은혜 주시고, 영생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사명이 있는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셔서 필요에 따라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하였습니다. 큰 집은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분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큰 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한 영혼이 죽고 사는 크고 엄청난 일이기에 큰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큰 집, 교회에는 각종 그릇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다양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초점이 그릇의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 은, 나무, 찰흙 상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재료, 비싼 재료로 만든 그릇이면 무엇합니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전혀 쓸모 없는 장식용이면 말입니다. 즉 초점은 주인이 사용하느냐 마느냐에 있습니다. 주인에게 쓰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필요할 때에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그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더러우면 사용할 수 없기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늘 말씀과 기도로 훈련 받는 것입니다. 매일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기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부르실 때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각기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들입니다. 자라난 배경이 다르고, 신앙의 성숙도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생김새도, 취미생활도 다 다릅니다. 그러나 택하여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자녀 삼으신 까닭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어디엔가 쓰시려고,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쓰임 받을 그릇으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잘 쓰임 받고 계십니까? 주인께서 자주 사용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정말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까? 사실 쓰임 받는 그릇은 축복의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용하시면서 축복을 그 그릇에 부으시지요. 그래서 더욱 잘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아나니아처럼 주님과의 교제 라인이, 통로가 늘 열려 있습니까? 자주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까? 그래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까? 그렇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성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삶에, well-being 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 주며 위로와 격려의 말로 힘을 주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내 생각, 내 사고방식, 내 의견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시든지 순종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나의 모든 것을 굴복시키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언제든지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을 사용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처럼 누구누구는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그런데 제가 오늘 강조하고 묻고 싶은 것은 아나니아처럼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워 여러분처럼 주님의 택함을 받은 그릇이 되어 그 사람도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일을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옆에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세워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높아지려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누르려고 합니다. 비방하고 깎고 내리고 해야 자기가 올라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은 낮추고 다른 사람들은 높여주며, 격려하여 세워주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실 어느 그릇하나 필요하지 않은데 값을 지불하고 사는 주부가 어디 있습니까? 남 보라고 장식용으로만 사는 그릇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 나라 위하여 우리 모두가 다 필요합니다. 부족한 부분들을 덮어주고 내가 그 부분을 대신 채우면서 세워줄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고 하였습니다. 외모로,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라 하더라도, 정결하며 그 안에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며”(고후 4:7) 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세워줄 때 그가 나중에 엄청난 일을 해 내는 대 사도가 될 줄 생각하였겠습니까? 그저 자신의 할 도리, 사람을 세워주는 일을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머지는 하시게 되고 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 중에 하나가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주님의 제자라면 옆 사람을 세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어찌하든지 그들을 세워 주님 나라 일군으로, 동역자로 주께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도록 도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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