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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4-20 (목) 23:05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533    
참된 믿음을 회복하려면(마 3:7-12)
신앙 생활 잘하다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 낙심하여 주의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언제나 기초, 기본이 중요하듯이 신앙도 기초, 기본으로 돌아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면서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명합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회개를(회심을) 한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게 되어 있어 구원을 받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뜻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Judaism)의 평신도들로, 율법의 예식이나 의식을 중요시 여기며, 백성들이 죄에 오염(汚染)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이 모든 것을 다 cover 하지 못한다고 하여, 나름대로 새로 많은 율례나 규례를 만들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의 유전(遺傳), 전통을 따르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너희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고 하였고 외식적인 그들을 향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고 꾸짖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죽은 후의 부활을 믿었으며,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았던 그들이었습니다. 한편 사두개인들은 히브리어의 의인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대제사장 족속이라고 믿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론 대제사장은 사두개파였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특별히 Torah 라고 불리우는 모세오경을 강조하여 지키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선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였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현실주의자들로 왜 부활이나 천사가 필요하냐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하게 주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보다 숫적으로 적었지만 부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성전 앞에서 돈을 바꾸며, 비둘기를 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진노를 사지 않았습니까(마 21:12-13).
   이렇게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공통점이 거의 없었으나, 유대의 가장 큰 공회의인 산헤드린 공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세례 요한 앞에 나와 회개하지 않고 그냥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호기심에서 혹은 정말 요한이 선지자인가 시험하려고 나왔겠지요. 실제 자신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자 나온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랴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7절하-8절)라고 말씀합니다. 조금 심하다 할 정도로 저들의 가식(假飾)과 참된 회개의 결여(缺如)를 꾸짖는 것입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종교적 위선이 얼마나 위험한 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도 뱀에게 유혹을 받아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고 직접 저들의 조상은 사탄임을 말하였습니다.
   정말 회개를 하였으면 행동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3장 7-14절에는, 회개의 열매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그 예를 들어 주고 있습니다. 옷이 두벌 있으면 한 번을 나누어 주고, 세리들도 거두어야 할 세금 외에는 거두지 말고, 군인들에게도 무죄한 자를 고소하지 하고, 돈 때문에 폭력을 쓰지 말고, 지금 받은 급료로 만족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함은 참된 회개는 그 바뀌어진 삶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가짜가 아닌 진짜(genuine) 회개는 회개 이후의 태도와 행동에서 보여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이웃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도 가르치는 회개는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 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죄를 버리고 의의 길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 죄악을 지으면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겔 33:18-19)고 하였고,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 14:1-2)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칠 때의 그 의미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버리고 의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임은 오래 전에 받은 교훈입니다. 사실 유대 랍비들이 가장 자주 가르쳤던 것이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公儀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죄에 대한 인식, 후회와 슬픔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회개가 아닙니다. 애굽의 바로 왕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습니다(출 9:27). 두 마음을 품었던 선지자 발람도 자신이 범죄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민 22:34). 욕심 많던 아간도(수 7:20), 사울 왕도(삼상 15:24), 아니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도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말하기를,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상)고 시인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결국이 어떻게 끝이 났습니까? 다 지옥가지 않았습니까?
   정말 통회하고 자복하여 회개한 사람은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이러한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죄성을 지닌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방인들이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 하였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 목사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4-25)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회개를 한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외식과 가짜였음을 알았기에 세례 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계속하여 9절에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인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참된 회개를 하지 아니하여도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하늘나라가는 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것에 많은 유익은 있어도(롬 3:1-2; 9:4-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유익이 오히려 큰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도 개인적인 믿음에 의하여 의인으로 천국백성이 되었다면(창 15:6; 롬 4:1-3), 하물며 그 자손들이 다른 방법으로 의인으로 인정되어 천국에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10절)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더욱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추수가 끝날 때가 되면 다음 해를 위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예수님께서 비슷한 비유를 거짓선지자를 향하여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고 하였습니다. 열매 없는 회개는 전혀 필요 없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불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였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지옥 불의 심판에 대하여 종종 말씀하셨습니다(마 5:22,29; 막 9:43,47; 눅 3:17). 세례 요한은 참된 회개를 하지 않고 자기 앞에 나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외치는 말씀이지만, 그의 심판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으로 이 무서운 심판과 아울러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11-12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이 주는 세례와 주님이 베푸는 세례가 다름을 말합니다. 자신은 내적인 회개에 따르는, 오실 왕을 맞이할 준비로 받는 외적인 예식(ceremony)이지만, 훨씬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베푸실 세례는 내적인, 성령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당시 종들의 가장 천한 일은 주인이나 손님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는 그 종 조차 되지 못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5-16)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교회(성도들)에게 주어졌습니다(고전 12:13). 문제는 불에 대한 해석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불과 같이 임했다는 표현이 있어서 불도 성령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문맥상 맞지가 않으므로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앞 10절과 뒤의 12절에 있는 불과 연관하여 불로 심판하시는 세례로 봅니다.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지옥 불의 심판을 일컫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타작 때가 되면 알곡과 쭉정이는 갈라서 알곡은 천국으로, 쭉정이는 꺼지지도 않는 불, 지옥으로 나누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저희는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믿음으로의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사탄 마귀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기회가 자주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참된 믿음이 회복되려면 먼저 자신이 어디서 어긋나 있는지 생각하고 참된 회개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주께 보여 주십시오. 결국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살지 마십시오. 살아있는 믿음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인정하고 슬퍼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태도와 행동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제발 속지 마십시오. 거짓과 위선으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하지 마십시오. 무서운 불의 심판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탄의 자녀들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고 흙으로 돌아감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세례 요한의 외침이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알곡와 쭉정이가 나누어질 날이 곧 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심지어 함께 교회에서 봉사까지 하던 사람이 나중에 지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장면을 말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 모두가 다 알곡이 되어 천국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알곡들은 참된 회개를 하고,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삽니다. 열매가 전혀 없는 나무도 쭉정이인 것이지요. 예수를 믿고 살면서 아무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거나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사 영생에 이르는 회개를 하고, 아무리 조그마한 죄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회개하여 버리고 변화된 모습 속에 의의 삶을 실천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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