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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5-22 (월) 09:2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93    
믿음이 있는 부부(마 19:3-10)




오늘이 우리 한국 달력에 부부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 그 유래를 찾아보니 1995년 5월 21일을 경남 창원의 권제도 목사님 부부가 그 해 어린이날 5월 5일에 한 어린이가 TV 인텨뷰에서 ‘우리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게 소원이에요’라고 하는 것을 듣고는,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되는 부부를 생각하고 21일을 부부부의 날로 정하자는 캠페인을 벌여서 결국 2007년에 국회 동의를 거쳐서 대통령 영으로 기념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깨어진 가정들이 너무 많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청교도들의 신앙이 사라진 미국 사회에서는 결혼한 가정 50% 이상이 이혼을 하고 있는 통계가 오래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아마 그 이상을 상회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황혼이혼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부부가 애들이 어릴 때에는 큰 상처가 될까 싶어 그냥 참고 살다가 다 커서 출가해 버리고 나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는 청년들이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묻습니다(10절).
   그러나 결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의 죄에 있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함에 있다고 예수님도 본문 8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부부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원래의 결혼제도, 부부관계에 있어서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목적, 그 뜻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용서하며 서로 복종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나가기를 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 21)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부부관계의 두 가지 중요한 열쇠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남편과 아내가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 섬기며,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결혼과 이혼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다시 한번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험하는 장면 속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문맥은 예수님의 공생애(public life) 가운데 약 2년을 갈릴리에서 제자들 하고만 생활하시면서 교훈을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 유대 지방에 가셔서 따르는 큰 무리 가운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1-2절).
   그 때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절하) 하고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혼문제에 있어서 한 쪽으로 치우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본문 10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만, 이미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예수님이 보수적인 것을 눈치챈 그들은 예수님이 이혼을 전혀 인정치 않든지, 아니면 쉽게 이혼하는 것을 반대한다든지 하여 유대인들 사이에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대답을 하실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보수적인 랍비 Shammai 학파와 자유주의적인 랍비 Hillel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여자를 인간답게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던 시대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 Hillel 학파 사람들은 자기 아내가 공적인 장소에서 머리를 내리기만 해도, 다른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빵을 구울 때에 조금만 태워도, 음식에 소금을 많이 쳐서 조금 짜게만 해도, 시어머니에게 잘못 말해서 언짢게 해도 이혼할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식을 못 낳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러니 하나님과 멀어진 지 오래된 그들은 이런 가르침을 즐겼습니다. 오늘날 쉽게 이혼하는 자유주의적인 세상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지요. 물론 보수주의였던 Sammai 학파의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도 오늘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는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결혼한 후에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남자 관계가 발견되면 그것이 즉각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모세의 율법이 있기 훨씬 전, 하나님께서 원래 남자와 여자의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4-5절, 창 2:18-24 인용)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론으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절)고 하십니다. 여기 한 몸이 되었다는 원어의 의미는 풀로 붙이다, 혹은 시멘트로 발랐다는 것입니다. 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뜻이라는 말입니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서로 상대방에게 이제 한 몸이라며 맺은 언약(covenant)입니다. 계약(contract)이 아닙니다. 계약은 어느 한쪽에서 얼마든지 깨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은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피로써 맺는 언약입니다. 어느 한쪽에서 깨뜨리면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에게는 생명 다하는 날까지 한 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에 바리새인들이 즉각 항변합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참고: 신 24:1-4). 그러나 율법에서 이혼을 허락한 경우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그것을 받을 수 없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를 자기 집에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수치되는 일이 간음이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에는 간음을 하였으면 즉시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어로 의역을 하면 결혼한 첫날 밤에 자기 부인이 처녀가 아닌 것이 드러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함을 알고 그런 경우에 헤어질 수 있는 예외를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꾸 왕을 달라고 하자 할 수 없이 그 완악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도록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울 왕 때문에 그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러면 9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혼할 수 있는 예외조항을 주신 음행(fornication)은 무엇입니까? 간음(adultery)과 다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음행은 간음과는 구별되는 성적인 죄입니다. 간음은 자기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 관계를 맺는 것이라 한다면, 음행은 ‘자기 몸을 판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 쉽게 말하면 창녀와 같이 자기 몸을 아무에게나 파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부부 사이의 성 관계가 아닌 간음을 비롯한 다른 모든 불법의 성적인 죄를 포함하는 말입니다만 그 단어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런 뜻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내를 데려온 후에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다고 버리는 것이 본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오늘 19장 바로 앞의 문맥이 무슨 말씀이셨는지 아십니까? 18장 21-35절까지 길게 비유의 말씀까지 사용하면서 네 형제를 용서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다만 이미 앞서 언급한 여자가 계속 음행을 저지른다면 이혼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마 5:32)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결혼 자체에 의문을 갖고 예수님께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절)라고 합니다.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던 시대에 예수님께서 아내를 그렇게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자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불신 청년들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나는 정말 행복한 부부를 본 적이 없어. 그러니 나도 결혼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 것이야’ 등 말입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비록 죄가 있어 때때로 결혼생활을 힘들어도 우리 믿는 부부들이 축복의 결혼생활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결혼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창조의 극치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하나되게 하신 것입니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연모하라”(잠 5:18-19)고 하였고,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고 하였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아 멘!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몇 가지 실제적인 적용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높은 수준의 부부관계를 기대하십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런 결혼 생활을 요구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부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도들 가운데는 참으로 예수를 믿기 전에, 중생체험이 있기 전에 이혼을, 혹은 재혼을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 믿기 전에 있었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음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 가운데서는 그런 사람이 많았기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고전 6:9-11). 셋째로, 부부들 가운데 한 쪽은 신자인데 다른 한 쪽이 불신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로서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가능하면 참고 살라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신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고전 7:16). 물론 때때로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가정을 버리고 떠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그렇게 고집한다면 떠나도록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 7:15)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말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넷째로, 우리는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죄로 가득찬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가만히 보면 때때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중에 죄를 적게 지을 수 있는 길을 택해야만 하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인줄 알면서도 이혼을 택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면, 계속해서 아내를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잔인한 남편과 결혼한 아내라든가, 남편이 도박이나 술, 마약으로 돈을 계속 낭비함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길러야 하는 아내일 경우 아무리 기도해 보아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들을 잘 길러야 하는데 더 이상 계속하다가는 아이들까지 다 망하게 될 경우라든가, 정말 용서하고 또 용서하면서 살려고 하는데도 계속하여 바람을 피며 밖으로 나도는 남편이나 아내를 만난 경우처럼 정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이 사람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아니 불신자보다 더 완악한 마음으로 배우자에게 대한다면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작은 죄를 택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를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단을 내리고 정말 신실한 배우자를 다시 만나서 새롭게 가정을 꾸몄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축복하시며 행복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는 가정들이 때때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기준이 바뀐 것이, 낮아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혼이나 재혼이 용서 받지 못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추한 과거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그 마음을 격려하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한 결혼을 절대로 이혼을 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용서하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기준을 쫓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 성도들을 향한 이해와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어떻게, 누가 돕겠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부부이신 여러분!
   결혼하고 한 평생 좋은 축복의 부부로 끝까지, 죽는 날까지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탄 마귀는 끊임없이 갈라 놓으려고 합니다. 경계하셔야 합니다. 성경적인 부부관계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너무 다른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의식 말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라는 의식을 늘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서로 많이 다른 점을 이해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다른 점을 그대로 용납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게 바꾸려고 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진솔한 대화(communication)가 필요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100% 헌신이 필요합니다. 바로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제일 사랑하는 대상이 배우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데, 영적인 필요는 배우자가 채워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엡 5:25).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고 하였으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께 하듯 복종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엡 5:22).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고 하지 않았습니까?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령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필요와 육체적인 필요를 서로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를 이용하려고 하면 안되고,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축복하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든교회의 부부들은 그런 부부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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