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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5-29 (월) 06:1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84    
시험 받는 자를 도우시는 주님(히 2:10-18)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잠시 세상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 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하며 여러 가지 고난을 겪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엡 6:12)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이 그런 시험을 통과할 때 도우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성경을 살펴 보십시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을, 요셉을, 모세를, 다윗을, 다니엘을, 아니 사도 바울 등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잘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울 수도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우리의 고난을 잘 아시고 이해하십니다. 이 은혜도 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참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담당할 속죄양은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했듯이, 우리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죄인인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을 친히 겪으셨기에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10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는 곧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창조되었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구원을 받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주님을 이 땅에 보내어 고난을 당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히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온전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10절에도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신다고 하였는데, 이어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11절)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 예수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우리들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게 된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 아들 예수님과 양자가 된 우리들이 형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달리 우리는 죄인이지만 믿음 때문에 의인이라 불러주시며,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한 가족으로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이 진리는 이미 시편 기자 다윗과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되어진 말씀임을 히브리서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12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 22:1)로 시작하는 시편 가운데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12절; 시 22:22) 하셨다고 합니다. 시편 22편 전반부는 오실 메시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보여주고 있고, 후반부는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승리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3절; 사 8:17,18) 합니다. 이는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함을 뜻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녀들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요 17:6)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는 순종으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지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인성을 말하면서 왜 그렇게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야만 했는지 설명합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14절) 하였습니다. 우리와 한 형제가 되려면 예수님도 인간이어야 하니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닌 분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죽으셨습니까? 이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머리를 치신 것입니다(창 3:15). 물론 아직 꼬리가 남아 있어 우리를 시험하고 어렵게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마귀는 전능한 영물이 아닙니다. 제한된 능력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완전히 불과 유황못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게 됩니다(계 20:10).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대적 마귀를 물리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15-16절)고 하였습니다. 만약 죽음이 두려우신 분들이 있다면 아직 복음을 제대로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롬 8:38). 죽음은 잠시 우리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육체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기 전에 죽음이 무서워 그의 종노릇하며 노예로 살던 우리는 이제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가 천사들을 붙들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붙들어 주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17절)고 한 것입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그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즉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서 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크고 놀라운 영원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받을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17절에도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는데, 곧 우리들과 같이 되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며 고난을 겪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고 하였습니다. 인간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무슨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예수님도 분명히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난 당하셨습니다. 40일 금식하신 후에 배 고프신 것으로 시험 받으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또 자기에게 절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물질적인 것을 다 주겠다는 사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후에도 온갖 조롱과 모욕, 침 뱉음과 채찍에 맞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까지 받으셨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피할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큰 형님이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겪어 보았고 견디었고, 결국 승리하셨기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죄의 유혹은 받았지만 죄를 짓지 않으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동정)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 자비하심, 인자하심, 그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약함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도 우리가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가정 문제도 우리가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조차 다 내어 놓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병든 것도, 숨기도 싶은 문제도, 못된 습관도, 모든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돕기 원하십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 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날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지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내 주님 서신 발 앞에 나 꿇어 엎드렸으니 그 크신 역사 이루게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자유하도록, 죽음의 권세가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에게 초첨을 맞추어야 합니까? 왜 늘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까? 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구원을 외면하면 안 됩니까? 그 대가는 너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1-4절). 죄에 대한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그 구원을 받아들이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엄청난 유익이 있습니다(5-9절). 죄 사함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워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제로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연약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받으며 힘들어 하는 우리를 친히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지나갈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 길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고난을 감당하시렵니까? 오늘도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이처럼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거절하지 마십시오. 그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와 구하십시오.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분명히 도와주실 분입니다. 도우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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