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76,012
오늘방문 : 873
어제방문 : 3163
전체글등록 : 3,859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7-10 (월) 06: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362    
믿음과 안식(히 4:1-11)


안식(rest), 즉 쉰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늘 하던 힘든 일을, 신경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쉰다고 하는 것은 아마 모든 인간의 바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이 하는 일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 3:16-19). 물론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며 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는데 힘들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기쁘고 즐겁기만 합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입니다. 바로 참된 안식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 천군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일은 해야 합니다(계 5:12-13).
   우리 하나님께서도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일하십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시 121:3-4).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안식과 믿음과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 안식을 영생, 구원으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사실 3장 7절부터 이어지는 믿지 않는 당시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출애굽한 후 광야 40년 동안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그 조상들의 예를 들면서 마음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하여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3:7-19). 마음이 강퍅하여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3:19)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한 경고로 믿지 않아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1절)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이 믿음이 없어 불순종하며 살게 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 같아 회개하고 믿도록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을 하셨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받지 못할 자가 그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 들었으나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2절)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화합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하려면 말씀을 믿고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1세대들 모두 다 모세의 손에 이끌려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너며, 광야를 행진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가나안은 억지로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억지로 교회에 끌려 나올 수는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 친구가 간절히 부탁하니, 혹은 누구에게 사랑의 빚을 졌기에 억지로 교회까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식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 때문에, 교만한 마음 때문에, 고집 때문에 혹은 자기 사랑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영혼은 쉬지를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 3장에서 두 차례나 인용했던 시편 95편 7-11절 가운데 11절 말씀을 다시 인용하면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3절)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는 우리들은 안식에 들어가지만, 믿지 않던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진노하여 맹세하시기를 결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신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론에 언급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안식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안식이 아니라, 창조 일을 완성하신 것을 뜻하는 안식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 믿는 자들이 누리는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Savior)로, 만주의 주(Lord)로 영접하여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유익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사는 자들이 주님에게 나아오기만 하면 주님께서 쉼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하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믿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안식은 마음의 안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져 주시는 멍에는 쉽습니다. 주님이 지라고 하는 짐은 가볍습니다. 전혀 힘들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지는 멍에며, 짐이기 때문입니다. 질 수 있는 능력을 성령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사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안식이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하기 위하여 창세기 2장 2-3절을 인용하여,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셨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4-5절)라고 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의 안식에 못 들어간 백성들을 언급하였습니다. 창조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의 안식이 있었고 그 안식은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재창조,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일 외에 또 무엇을 창조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로는 온 우주 세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이미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모습 이대로 완전히 받으셨다는 것과 우리의 삶 속에 그 능력과 축복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힘과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며 사랑하며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살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믿지 못하여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5절).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증거해주는 순종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미 안식을 누리고 있으며, 훗날 영원한 안식을 누릴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6-7절)라고 또 시편 95편 7-8절 말씀을 인용하며 말씀합니다. 안식에 들어갈 자들이 분명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복음을 전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순종하지 않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 1세대가 불신앙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후 500여 년이 지난 후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하듯이, 다윗 때에도 안식의 기회가 그 백성들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믿고 말씀을 따른다면 그들도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출애굽 1세대들에게 안식을 줄 수도 없었고, 안식으로 인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안식할 어느 날을 다윗이 말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8절)고 한 것입니다. 여기 다른 날은 바로 7절에 다윗이 말하는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이라는 날을 뜻합니다. 물론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영적)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가 ‘예수’라는 헬라어의 히브리식 이름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여호수아는 그 백성을 완전한(영적)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으나 훗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도할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9-10절)고 하였습니다. 그의 안식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쉬신 것처럼 쉬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기에 쉬는 안식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바로 지금 주님의 임재와 평안과 기쁨을 맛보는 안식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지는 안식입니다(골 2:10). 그런데 이 안식이 전부는 아닙니다. 훗날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롬 8:23), 죄성이 사라지고 주님의 몸과 같이 변화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시간에는 더 풍성하고 영원히 안식을 누리게 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말입니다. 이미 믿고 사는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는 결론을 맺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11절)고 하였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힘써서 노력하면 안식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떻게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성경 전체적인 교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13장 7절부터 계속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불신앙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이 걸어갔던 예를 생각하며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힘들수록 더욱 주님을 붙들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늘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내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말입니다. 매일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성령님을 힙입고 사탄 마귀와 싸웁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와 평안, 기쁨을 누리며 싸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노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6월에 미국 아이젠 하워 장군이 연합군과 함께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승리의 큰 분기점을 이루었습니다. 그 날을 D-day 라고 합니다. Decision Day 를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년 2개월을 더 전쟁을 치른 후 연합군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고 나서,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떨어뜨린 후에야 비로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 날을 V-day, 즉 Victory Day 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탄 마귀의 머리를 치셨으나(창 3:15), 아직 우리의 영적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날, 우리가 이 땅에서 하직하는 그날이 사실 Victory Day 입니다. 그 때까지는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구세주로, 주로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인생이 고달프지 않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쉬고 싶지 않습니까? 아직도 우리 주님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을 듣지 않고, 홀로 힘들게 수고하며 짐을 지고 사십니까? 자신의 아들의 피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시고 계십니까? 마음의 문을 여시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 교제함으로 안식을 맛보고 있습니다. 비록 어떤 때 육신이 힘들어도 영혼은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영원한 안식은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이 구속을 받아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뀔 때에 올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오늘도 안식을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비록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계속 사탄 마귀와 싸우면서 살지만, 우리 주님께서 힘주시고, 성령님께서 도우시고 계신 줄 믿습니다.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주님을 붙들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불순종의 길을 걷지 마십시오. 과거에 불신앙으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결과를 기억하십시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39 수요설교 산 소망으로 사는 나그네 (벧전 1:1-5) 한태일 목사 2022-04-07 498
1238 주일설교 너희 말과 같이 (눅 22:63-71) 한태일 목사 2022-04-03 498
1237 주일설교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눅 22:54-62) 한태일 목사 2022-03-27 569
1236 수요설교 의인의 믿음의 기도 (약 5:13-20) 한태일 목사 2022-03-24 597
1235 주일설교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눅 22:47-53) 한태일 목사 2022-03-20 546
1234 주일설교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눅 22:39-46) 한태일 목사 2022-03-13 585
1233 주일설교 실패하지만 결국은 ... (눅 22:31-38) 한태일 목사 2022-03-06 676
1232 수요설교 참고 인내하라 (약 5:7-12) 한태일 목사 2022-03-03 660
1231 주일설교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삿 6:11-17) 관리자 2022-02-28 479
1230 주일설교 연약한 제자들 (눅 22:21-30) 한태일 목사 2022-02-20 637
1229 수요설교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약 5:1-6) 한태일 목사 2022-02-17 582
1228 주일설교 최초의 성찬식 (눅 22:14-20) 한태일 목사 2022-02-13 799
1227 주일설교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눅 21:37-22:13) 한태일 목사 2022-02-06 609
1226 수요설교 선을 행하라 (약 4:13-17) 한태일 목사 2022-02-04 522
1225 주일설교 조심하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리 (눅 21:29-36) 한태일 목사 2022-01-30 588
1224 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 (3) (눅 21:20-28) 한태일 목사 2022-01-23 590
1234567891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