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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8-31 (목) 11:03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528    
붉은 빛 짐승을 탄 음녀(계 17:1-6)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대작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에 보면 두 성이 나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도성, 즉 하늘의 성과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도성인 땅의 성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를 이 두 성의 사람들의 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땅의 도성의 기원은 동생 아벨을 살인한 형 가인이 세운 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창 4:17).
하지만 노아 홍수의 심판으로 가인의 도성은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창세기는 그 후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에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 바벨탑을 쌓은 자들은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흩어진 사람들은 유명한 도성을, 문명을 쌓았습니다. 열심히 성과 대를 쌓아, 스스로 하늘에 닿게 하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위대한 도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셨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 나일강의 문명의 상징 멤피스 도성, 유브라데 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헬라제국, 이어서 로마제국 등 말입니다. 이 도성들, 나라들은 각 시대의 바벨이었습니다. 군사적인 힘과 정치조직으로 상업적,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를 이루었습니다. 이 도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큰 바벨론(5절)의 선구자들입니다. 하지만 다 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최후의 큰 바벨론이 어느 도성을 정확히 말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이 도성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해석처럼 음녀로서의 큰 성 바벨론, 마귀의 나라와 순결한 신부로서의 예루살렘 성, 하나님 나라의 투쟁이 세상 역사라면 그 종말은 하나님 나라인, 순결한 신부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왜냐하면 신랑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명이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라면 도저히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장에서 사도 요한에게 짧은 새로운 환상으로 부활의 주님께서 그를 이리 오라고 초청합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절)고 하셨습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란 많은 나라들 위에 군림한 막강한 실력의 음녀를 뜻합니다. 음녀란 순결한 신부와 달리 다른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 영혼과 가정을 파괴시키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음녀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잘 되려면 이 음녀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이 음녀에게 잘못 보이면 이 세상에서 잘 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이 음녀가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2절)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임금들 중에 이 여자와 음행 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음행이라 함은 인본주의 정신, 세속주의 사상, 우상숭배 등을 말합니다. 이 음녀가 세상 사람들을 그 사상에 빠지게 하여 음란한 짓을 하게 합니다. 이 음녀의 뛰어난 미모와 화려한 치장과 술수가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걸려들게 만듭니다. 한번 걸려들면 완전히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성의 노예, 돈의 노예, 미모의 노예, 술의 노예, 마약의 노예, 인본주의 사상 등의 정신적인 노예가 되면 완전히 망할 때까지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마음대로,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방식대로 다른 사람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며 산다면 이미 음녀에게 걸려든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그 음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3절) 하였습니다.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간 이유는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더욱 똑똑히 그 정체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본 것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였습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빛이 아닌 붉은 빛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즉 이 세상의 막강한 권세를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의 몸에 참람된(blasphemous) 이름들, 즉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 적혀 있었습니다. 사실 권력 자체가, 돈 자체가, sex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가 자꾸 그것들을 절대화 시킵니다. 우상화 합니다. 그 결과 그것들을 허락한 하나님 앞에서 참람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하더라”(4절)고 하였습니다. 당시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거나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밀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이 음녀가 화려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이 입고 있는 흰 세마포 옷과는 대조가 됩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으로 속사람을 단장하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또한 음녀는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그 안에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그 정체는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5절)고 합니다. 음녀가 세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비밀(Mystery), 다른 하나는 큰 바벨론(Babylon the Great), 그리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Mother)라고 합니다. 비밀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복음을 비밀이라고 한 것(엡 6:19; 골 1:26-27)을 본 딴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악령의 지배로 사람들의 정신을, 사상을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입니다. 큰 바벨론은 서론에 언급하였듯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으로 이룬 도성의 대명사입니다. 인본주의, 세속주의 나라입니다.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한 것은 바로 비밀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나온 모든 사상, 우상숭배가 이 짐승을 탄 음녀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계시록의 말씀을 받는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소망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것들에 빠지지 말고, 세상 것들에 대해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있다가 지나가는 정거장일 뿐입니다. 본향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그저 매 순간 믿음으로 성령님을 따라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 음녀의 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6절) 하였습니다. 이 음녀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순교하여 그 피를 흘리게 했고, 그것도 모자라 순교자들의 피에 취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음녀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영혼은 사는 것이기에 … 요한이 기이히 여긴 이유는 이 음녀가 성도들을 그렇게 죽이면서 자신을 치장하며 취하였나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결국 이 세상은 두 도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와 음녀의 나라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맺은 백성들과 음녀와 관계를 맺은 백성들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과 악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과 음녀의 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상들, 철학들, 학설들, 신념들, 종교들이 있지만 결국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 가치관은 어느 쪽입니까?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에서 잘 살아 보겠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환경에서 편하고 즐기면서 살아보겠다고 한다면 음녀에게 휘둘려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악한 사탄 마귀가 모든 부분을 조종하고 통제하며 다스리는 가운데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아니 그 이름을 모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저 인간이 만족하면 됩니다. 인간이 최고이면 됩니다. 뉴 에이즈 운동처럼 인간이 하나님이 되면 됩니다. 인간이 영광을 받으면 됩니다.
이런 악한 음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싸워 이기려면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음녀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알곡들 만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며, 이 음녀와 싸울 수 있습니다.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분이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삶의 주인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만 다닌다는 것은 교회 안에도 음녀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교회를 인간중심의 교회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사실 오늘날 그런 교회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가 구분이 안됩니다. 그런 교인들은 그저 화려하게 겉 모양 치장에만 신경쓰고,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재미있게만 사는데 마음이 가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신자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술 마시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며 그저 자기를 위하여 산다면 이미 음녀에게 넘어간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절대로 그런데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자신을 단장하며, 사랑으로 성실히 다른 사람을 돌보려고 합니다. 잘 사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만족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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