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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1-04 (금) 04:20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124    
믿음의 교제(몬 1:1-7)
중국은 14세기 명나라 때부터 로마 천주교가 중국 선교를 하다가 18세기 초에 청나라 때에 중단되었고, 개신교 선교는 19세기 초 영국의 Robert Morrison 선교사를 시작으로 Hudson Taylor 선교사로 이어지면서 복음을 활발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보다 먼저 복음을 받은 중국은 1918년 공산주의가 등장한 이후에 기독교 운동이 계속 위축되어 오다가 모택동이 1966년에 문화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모든 교회가 말살되었고, 모든 선교사도 중국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중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1979년 모택동이 실각이 되고 등소평이 정권을 잡은 후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하며 서방 세계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중국 내의 신자들은 문화혁명 이전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1980년에 약 50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다 없어진 것 같았지만 더 순수한 모습으로 개혁되어 있어서 서방의 기독교계는 놀랐다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무도 모르지만 약 5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에 있는 기독교인 숫자는 약 1억 5천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공산당원보다도 더 많다고 합니다. 현재는 2억 넘는 것으로 여깁니다. 문제는 이를 위협적으로 느낀 시진핑 정권이 최근에 들어와 옛날 모택동처럼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어서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고,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핍박이 심할수록 뿌린 씨앗들이 싹이 나고 꽃이 펴서 열매가 많을 줄 믿습니다.
선교 전문가들은 이러한 중국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원인을 문화혁명 이전부터 중국 교회 내에 존재했던 ‘소 그룹 운동’에서 찾았습니다. 이 운동이 자연스럽게 지하교회, 혹은 처소교회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소 그룹 운동의 최초 그림은 신약시대 초대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 강림 이후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고 하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면서도, 매일 각 가정에서 음식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은혜 베풀기를 즐거워하니 주님께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중국 지하교회에서도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중에서 오늘 본문의 빌레몬서에도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옥중에 갇혀있던(1절)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의 집으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 집의 종으로 있던 오네시모가 도망하였다가 바울을 만나 회심을 하고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된 후에 다시 그를 빌레몬의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사랑으로 대할 것을 권면하는 편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레몬을 가리켜 1절에 그의 “사랑을 받는 동역자”로 표현을 하고 있고, 2절에 그의 아내로 여겨지는 압비아와, 학자들마다 의견이 달라 그의 아들인지, 장로인지 확실하지 않은 아킵보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군사된” 자로 말하면서, “네 집에 있는 교회” 라고 합니다. 바로 빌레몬의 집을 가정교회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초대교회는 성전에서도 모였지만, 가정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나라 중국에도 그러한 가정교회들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핍박 가운데서도 성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부흥하기 원하는 눈 뜬 교회, 건강한 교회들은 바로 이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 운동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소 그룹 운동, 구역 모임이 보다 더 활성화되어 부흥을, 회복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가정교회, 즉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구역모임에 전심을 쏟아야 합니까?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구역 예배와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구역모임에서는 평신도들도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 영적으로 타락해가던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개혁을 부르짖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인제사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제나 신부만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고, 평신도는 직접 나갈 수 없다라는 잘못된 천주교 교리를 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평신도들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특권이 있고, 이는 특권인 동시에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음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첫 종교개혁이 사제의 손에만 있던 성경책을 평신도의 손에 넘긴 사건이라면, 둘째 종교개혁의 과제는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제대로 넘겨 그들을 평신도 사역자로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만인제사장’의 진리가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잘 지켜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 가운데 실제로 사역하고 있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교회가 점점 양적으로 늘어가면서 방관자(bench warmer), 마치 공연장의 구경꾼들만 많아지지, 실제로 일하는 일군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래도 평균 통계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지만, 일반적으로 교인의 20%만 일을 하지, 80%는 구경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역 모임에서 함께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며, 교제를 나누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소 그룹이기 때문에 구역원들 거의 모두가 일을 하여야 합니다. 구역 모임이 소 그룹이기 때문에 구조상 사람들의 은사가 쉽게 관찰되고, 서로에게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어서 각자의 역할을 분배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잘 빠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단 이탈자가 방관자가 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구성원 모두가 사역에 뛰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구역장이 목회자의 동역자이며, 구역원들이 담당해야 할 일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도의 참된 믿음의 교제도 구역모임에서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구역모임에 신경을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떻게 100여명씩 넘게 모이는 데서 서로의 삶을 진솔이 나눌 수가 있겠습니까? 구역모임에도 성경공부도 있고, 기도도 있습니다. 찬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구역모임의 본질이 아닙니다. 바로 전통적인 구역예배와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본질은 ‘코이노니아’ 즉 교제입니다. 바로 믿음의 교제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삶을 나누고, 서로의 삶 속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 5-6절을 보십시오. 빌레몬을 위하여 바울이 기도를 하면서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의 집에서는 믿음과 사랑의 살아있는 참된 교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의 교제 결과가 그들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선한 것들을 알게 하며,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7절)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이 자기 집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으로 그 성도들이 삶의 위로를 얻기도 하고 주님 주시는 기쁨을 체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서로 참된 교제를 나눔으로 얻은 기쁨과 위로로 세상을 정복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힘은 바로 이 믿음의 교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며 힘써 기도하면서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역장을 비롯한 구역원들은 자기의 삶을 나눌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해야 합니다. 실제 구역모임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신이 지난 주간 살아온 이야기, 자신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들어주는 시간입니다. 이런 믿음의 교제가 우리에게 치유와 위로, 격려 더 나아가 변화를 체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제자 훈련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구역모임이야말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한 구역모임에서 치유의 은혜를, 회복의 은혜를 받은 구역원들이 다음 구역모임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러한 가정 교회를 주장한 Tom Allen 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메마른 교회 안에서 오아시스처럼 물을 내뿜는 구역모임들, 앞으로는 이 소 그룹 공동체들만이 슬픔과 문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삶의 치유책을 제공할 것이다. 교회 역시 참되고 역동적인 공동체 생활, 즉 초대교회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를 드러내 보일 때에만 비로서 참된 교회의 역할을 온전히 발휘하고 세속적인 세상에 성공적으로 침투하여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전도에도 구역모임이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역모임은 교회의 세포 조직과도 같은 것입니다. 세포(cell)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세포 자체의 성장이 아니라 증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분열을 통하여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의 암 세포는 자기만 커지지 분열되어 증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자체적으로 커지기만 하는 것은 암과 같은 구역입니다. 구역모임도 일정한 숫자가 되면 나뉘어져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의 구역들은 자꾸 나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누어지는 이유가 전도를 통하여 구역 식구들이 늘어나서 나누어질 때 교회는 가장 건강한 방법으로 주님의 지상사명을 성취해갈 수 있습니다. 구역모임의 존재 이유도 우리 몸의 세포처럼 증식되는 것에, 전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그들로 또 제자를 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마 28:19-20). 그들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빌레몬이 속해 있던 골로새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하였습니다.
사실 증식하지 못하는 세포가 병든 세포인 것처럼 재생산하지 못하는 구역도 병든 구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느 교회 구역 모임에서는 빈 의자, 빈 방석의 축복의 리스트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마침내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구역 모임의 존재 이유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역모임에서는 불신 이웃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의 차 한잔을 나누고, 여럿이 한 사람에게 공동으로 관심을 보이며 작은 도움이라도 베풀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전도에 효과적인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Michael Green 은 그의 저서 ‘초대교회의 복음전도’에서 “딱딱한 형식이 배제된 가정에서 긴장을 풀고 쉬는 분위기, 이와 함께 병행되는 손님 접대야말로 초대교회가 복음전파에 성공하는데 가장 완전한 상황이었다. . .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 고린도 회당 건너편 디도 유스도의집, 가이사랴 빌립의 집,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 간수장의 집이야말로 1세기의 세상을 변화시킨 복음전도의 센터들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민 생활이 힘들어도 서로 집을 열고 구역원들과 전도대상자들을 초청하여 사랑을 나누면 전도의 열매들을 볼 수 있고, 부흥을, 회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각 구역모임들이 믿음의 교제를 통한 복음전도의 센터, 사랑 나눔의 센터, 치유와 회복의 센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저는 구역모임이 왜 중요한지 이유 세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사역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직분을 잘 감당하려면 구역 모임에 잘 참여하여 제사장 사역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구역모임이라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 사랑과 믿음의 교제가 잘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진솔이 삶을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사랑하기를 배워 이웃을 사랑하며 더욱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땅에 교회를 주신 목적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주셨기에,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구역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특히 구역장, 권찰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비전을 바라보며, 구역모임 인도를 잘하여, 올해는 놀라운 열매들로 하나님께 크신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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