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120,245
오늘방문 : 3644
어제방문 :
전체글등록 : 3,866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12-12 (일) 04:2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64    
화목하게 하는 직책 (고후 5:18-21)


이제 다음 주일이면 올해 성탄주일이 됩니다. 제가 즐겨 듣는 기독교 방송에서는 요즈음 24시간 거의 크리스마스 캐롤, 성탄 찬송이 들려옵니다. 올해의 성탄을 맞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2000여년 전에 베들레헴에 아기로 탄생하신 이유 여러가지를 생각해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아기 예수를 이 땅의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리고, 이 특별한 사랑을 입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맡겨준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화목(화평)하게 하는 직책 혹은 직분(diakoni,a, ministry)을 맡았습니다. 우리만 하나님과 화목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원수로 지내는 사람들도 화목하게 하는 사신(20절), 즉 하나님 나라 대사들이 된 것입니다. 이 직책은 내가 싫다고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 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 부르실 그 날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말입니다(17절).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네 구절에서 5번씩이나 “화목(katallagh,, reconcili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원어의 뜻은 ‘하나님과 친구가 되게 함’ 입니다. 원수였다가 화해하여 친구가 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혹은 부부가 싸웠다가 화해할 때도 쓰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18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우리를 먼저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고, 그 결과 우리에게 또한 화목하게 하는 일을 주셨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18절)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것이”라 함은 바로 앞 17절에서 언급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원수로 지내기 보다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다가 화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화목”은 인간관계에서의 화해와는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화해함은 관계가 불편한 양쪽을 설득을 해서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쌍방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양보를 하며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화목은 동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믿기 이전의 과거의 삶이 죄된 삶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사람의 모습을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정 부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시작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인 우리와 화목하게 되기 원하기에 최초의 사신으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정말 우리 같으면 더 이상 대화나 용서가 불가능할 텐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참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화목제물로 받으시고, 그의 죽음을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을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용서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아니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먼저 믿은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는 사신으로, 대사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게 되기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였습니다. 그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말과 행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화목하게 되기 원한다면 우리를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화목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핍박하거나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이 되게 하시려고 양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절)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실을 보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차별 없이, 백인종이던 흑인종이던 황인종이던 상관없이, 부자이던 가난한 자이던 상관없이, 배운 자이던 못 배운 자이던 상관없이, 잘 생긴 사람이던 못 생긴 사람이던 상관없이,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 사함을 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좋은 소식(good news), 곧 복음(euvagge,lion, gospel)이며, 우리에게 부탁하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들의 마음도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부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아니 간곡히 설득해야 합니다.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라’ 식의 전도는 안됩니다. 우리의 눈에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혼들을 향한 열정(passion)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의 기도와 호소가 필요합니다. 행실로도 사랑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물론 믿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통해 화목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바울도 고린도교인들 가운데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간곡히 전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절)! 즉 하나님이 바울을 통하여 그들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는데, 제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합니다. 아니 간청이라기 보다, 명령형으로 쓰였으니 강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잘 아는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권면하라고 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사신은 왕을 대신하여 다른 나라에 어명을 전하는 자입니다. 대사는 그가 속한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파견된 나라에서 자국을 대표하여, 자국의 유익을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하나님 나라의 사신, 대사라고 한다면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하여, 확장을 위하여 몸바쳐 충성해야 합니다. 자국과 파송된 나라가 화평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죄인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우지 않고 백기를 드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사신은 평화의 사신인 것입니다. 제발 다 내려놓고 백기를 들고 항복하면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상대가 되는 사람하고 싸워야지, 정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속히 항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창조주와 피조물이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인이 감히 죄를 가진 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죄인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대항하려고 하십니까?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속히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택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고집부리시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억지로라도 항복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불신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사신이 될 수 있는 이유를 2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누가 먼저 죄인들을 향해 손을 내민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전혀 모르시는 분입니다.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죠. 그런데 하나님이 스스로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의 분신인 성자 예수님을 보내 대신 심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때문에 아들을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죄의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치 첫 사람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듯이,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하였으며,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 5:15-17)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화평의 사신이란 자신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적대 관계에 있는 두 나라 사이를 화평하게 하기 위하여 적진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창피를 무릎 쓰고, 위험을 무릎 쓰고 가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 인질이 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제일 먼저 이 땅에 화평을 이루기 위한 사신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시고 난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화목하게 하는 사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 모두는 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보냄을 받은 화평의 사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아직 남겨두신 가장 큰 이유는, 아니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입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화목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고, 삶에서 행동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줄 믿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감화 감동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설복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미쳤다는 비방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 마귀가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이 직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 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9-20)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전해야 합니다. 전하라고 주신 것을 전하지 않으면 곧 명령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사신의 자격, 대사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 어느 곳에, 어떤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전할 기회를 주실 때에는 전해야 합니다. 선물은 나누라고 준 것입니다. 나만 갖고 있으면 훗날 하나님께 야단 맞을 때가 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입니다. 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약 우리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멀리 외지에서 선교하는 일만 칭찬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 교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사신들이, 대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계절에 우리 주위에 아직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드릴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 복음입니다. 제발 하나님과 원수로 있지 말고, 화목하라고 사랑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41 절기설교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4-49) 한태일 목사 2022-04-16 537
1240 주일설교 저희 뜻대로 넘겨주다 (눅 23:1-25) 한태일 목사 2022-04-10 613
1239 수요설교 산 소망으로 사는 나그네 (벧전 1:1-5) 한태일 목사 2022-04-07 504
1238 주일설교 너희 말과 같이 (눅 22:63-71) 한태일 목사 2022-04-03 514
1237 주일설교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눅 22:54-62) 한태일 목사 2022-03-27 574
1236 수요설교 의인의 믿음의 기도 (약 5:13-20) 한태일 목사 2022-03-24 609
1235 주일설교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눅 22:47-53) 한태일 목사 2022-03-20 553
1234 주일설교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눅 22:39-46) 한태일 목사 2022-03-13 597
1233 주일설교 실패하지만 결국은 ... (눅 22:31-38) 한태일 목사 2022-03-06 702
1232 수요설교 참고 인내하라 (약 5:7-12) 한태일 목사 2022-03-03 686
1231 주일설교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삿 6:11-17) 관리자 2022-02-28 490
1230 주일설교 연약한 제자들 (눅 22:21-30) 한태일 목사 2022-02-20 651
1229 수요설교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약 5:1-6) 한태일 목사 2022-02-17 601
1228 주일설교 최초의 성찬식 (눅 22:14-20) 한태일 목사 2022-02-13 815
1227 주일설교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눅 21:37-22:13) 한태일 목사 2022-02-06 619
1226 수요설교 선을 행하라 (약 4:13-17) 한태일 목사 2022-02-04 526
1234567891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