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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6-08-12 (토) 05:0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563    
[4/9/06] 잘못된 믿음
잘못된 믿음 (요한복음 12:12-16)

이 세상에서 오해 때문에 생기는 많은 사건들이 사람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그래서 결국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참 오해가 무섭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오해함으로 그 사람이나 사건을 잘못 믿고, 삐뚤게 여김으로 오해가 풀어지기 전에는, 진실을 알고 올바로 믿기 전까지는 그 선입견(presupposition) 때문에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아마 이 전에 개신교회(Protestant Chruch)를 다녀보신 분들, 혹은 우리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보셨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고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thesis of protesting)을 붙였습니다.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95개 조항으로 지적함으로 무너졌던, 타락했던 기독교 신앙을 재건하자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불길이 쯔윙글리나 칼빈을 통하여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개혁주의의 신앙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종교개혁의 동기가 천주교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천주교회, 그 성직자들의 타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추기경에 오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루터 바로 전 세대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많은 첩을 두고, 4명의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성직자 축첩 제도까지 만들려고 하였던 정말 구제 불능의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고아원의 태동은 그 때에 신부들과 수녀들 사이의 성범죄로 말미암아 생긴 사생아들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의 취미는 도박이었다고 합니다. 귀족들과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돈을 걸고 카드 놀이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 죽은 영혼들의 죄까지 사해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서 면죄부를 팔아 많은 돈을 축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청렴한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네 자식을 몹쓸 놈으로 만들려면 로마 천주교의 성직자가 되게 하라’고 절규하였었습니다.
이렇게 교황이나 추기경, 신부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 개혁의 동기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윤리적인 문제였다면, 루터나 칼빈은 결코 로마 천주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주교회에 남아 잘못된 윤리를 정화하며, 도덕적 청결한 삶을 위하여 투쟁하였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주의자들이 막강한 권력의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면서 순교의 각오로 개혁 운동을 가속화 시킨 것은 윤리, 도적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 때문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윤리나 도덕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윤리나 도덕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은 몇 사람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수 세대에 걸쳐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무서운 것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 의식(儀式)을 집어 넣었습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영광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예수님처럼 행세합니다. 마리아를 무죄한 사람으로 숭배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고치겠다고 일으킨 운동이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오늘은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채 남겨놓지 않고, 이미 예언되어진 구약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주일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로마 정권을 뒤엎고 이제 유대인 자신들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줄 알고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고 찬양을 하였기에 종려주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을 불러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눅 19:30).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이적들을 마음에 떠올리며 기쁨과 환호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전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드디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왕으로 여기며 외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13절)! ‘호산나’는 ‘주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영혼 구원이 아니라 육체적 구원을 원했던 그들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잘 살게 되기만을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오해가 잘못된 믿음이 되어서 이제 며칠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됩니다. 3년간 그렇게 진리를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제 바로 다가온 예수님의 메시아적 운명, 죄 없으신 어린 양의 희생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 잘못된 믿음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찬양 자체는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또한 제자들과 온 무리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이 노래가 예수님께 맞추어져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 같은 노래를 하나님께 부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책망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하였습니다(눅 19:39). 제자들과 온 무리들도 잘못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다른 각도에서 잘못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향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환영과 찬양은 비록 잘못 믿고 하더라도 그 노래 자체는 참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었기에 어느 피조물이라도 이를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겠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예수님이 ‘주(Lord)’이십니까?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짧게 예수께서 한 어린 나귀를 만나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공관복음에서는 아주 길게 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미 예언된 말씀(슥 9:9)의 메시아임을 아시기에 그 말씀에 따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는 다윗의 자손이요, 평화의 왕임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이는 예수님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는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겸손의 왕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높음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의 처지로 내려 앉아 함께 울고 함께 웃기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한 마음가짐에서, 상대방을 거칠게 대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사람과 가까워지는 온유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이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죄와 사망이 주는 영적인 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짓누르고 죄책감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죽음의 공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죄와 사망의 짐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우리에게서 떠났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인생 여정의 걸음에서 우리를 짓누르는 수고와 슬픔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가다가 지쳐 쓰러질 때면 그 짐을 함께 져주시는 겸손하고 온유하신 왕이십니다. 할렐루야!
또한, 우리 위하여 희생하신 왕이십니다. 유월절에 수많은 어린 양들이 목숨을 잃는데,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지막 유월절 양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희생되는 짐승의 수는 약 256,000 마리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러한 희생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대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 말씀 후에 자신을 가리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일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본받아 자신을 부인하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처럼 예수님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자들도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의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줄 생각났더라”(16절)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을 갖고 살지 마십시오. 잘못 믿는 것이나 믿지 않는 것이나 다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성직자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앉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왜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삶이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하여 불신자들에게 조롱을 받아야 합니까? 문제의 근본적인 본질은 잘못된 신앙,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를, 가정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올바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로 믿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이미 축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적어도 개혁주의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배우시니 말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율법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단호한 도전을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를 변질시키는 가장 큰 대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복음의 혼합화 현상이 극심해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심리학을 뒤섞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실제 내용은 프로이드라든지, 스키너 등의 심리학자의 주장의 영향을 받아 설교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 사회주의를 뒤섞어 버립니다. 설교에서 주님의 말씀보다는 마르크스, 레닌의 이야기가 더 강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동양 철학 명상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또 어떤 이는 복음에다 세상 Show Business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공연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인본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수한 복음의 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라고 하였는데 실상 단순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결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미래를 본다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슬퍼하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함께 예배순서에 맞추어 찬양을 부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참으로 주님께서 기쁘시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희생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온갖 수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인 줄 알고 믿으면,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찬양을 드리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미 구원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우리 주위에 잘못 믿고 있거나, 믿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슬퍼하십니까? 안타깝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영혼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고자 예수님처럼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희생할 수 있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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