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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2-13 (월) 11:3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286    
파트너에게 사랑의 인사를(롬 16:1-16)


지난 두 주일 동안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15장 14절부터 33절까지 로마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파트너, 자신의 파트너가 되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파트너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친구, 혹은 동역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있고, 비전이 같고, 신뢰할만한 파트너가 있다면 참 행복한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런 파트너가 된다면 더 행복한 것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성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여러분을 좋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잘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힘든 경우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동안의 전도여행에서 만난 파트너들을 소개하면서 로마교회 교우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모두 28명과 5가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소개할 때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들)’, ‘처음 익은 열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자’, ‘나와 함께 갇힌 자’, ‘내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자’,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자’, ‘내 어머니’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거의 모두가 평신도들입니다. 그리고 아주 다양합니다. 남자 17, 여자 9, 부부 2, 노예 5, 자유인, 유대인, 이방인, 부자, 가난한 자 등 바울의 파트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2000여 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종종 목사나 신학자, 즉 교역자들이나 선교사들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역사적으로 길이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도왔던 평신도들의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평신도의 영광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충성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이것이 위대한 평신도의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은 자들은 나중에 천국가면 칭찬과 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교역자들이나 선교사들을 도왔던 무명의 평신도들이 큰 칭찬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맨 처음 추천하는 사람이 뵈뵈라는 자매입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1-2절)고 하였습니다.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 시 바로 옆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이 교회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여기 일군(diako,non, deaconess)은 오늘날로 표현하면 여집사를 뜻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고린도에 약 1년 반을 머물 때에 전도했던 뵈뵈 자매가 겐그레아 교회 여집사로 수고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뵈뵈가 바울을 대신하여 로마서를 전달한 자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신뢰한 것입니다. 이 뵈뵈 집사를 로마교회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영접해 주고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교우가 오면, 아니 오래된 교우일수록 성도로서의 합당한 예의를 갖추고 대하여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어야 하구요. 그게 사랑이지요.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고전 13:5). 도움이 필요한데도 나 몰라라 하면 파트너가 못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뵈뵈 집사를 그렇게 추천하는 이유가 그가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이고 합니다. 여기 보호자는 큰 도움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 사람과 바울을 재정적으로 돕는 집사님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교역자나 선교사에게는 때로 말하기 어려운 재정적인 애로가 있습니다. 일일이 다 교회에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제게도 가끔 개인적으로 돕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고마운 분들이지요. 제가 그런 돈을 뭐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하겠습니까? 다 성도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사용하지요. 없으면 제 개인적인 사비를 써서라도 돕지요. 제 돈이 제 것이 아니니까요.

바울이 맨 처음 언급한 뵈뵈 집사는 로마교회로 보내며 강력하게 추천하고 도우라고 합니다만, 이후부터는 다 “문안하라”로 시작합니다. 사랑의 인사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문안인사를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유명한 브리스가(혹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3-4절)고 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주후 52년 로마 글라디우오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려 모두 로마시에서 쫓아낼 때 고린도로 도망가 거기서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행 18:1-3). 그 때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완전히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정성껏 도왔습니다. 또 바울이 에베소로 옮기자 거기까지 따라가서 그의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행 18:18-19, 26).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이 부부를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성경도 잘 배워 아볼로를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에 로마 황제의 추방령이 해제되었을 때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도 이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6:19). 바울은 나중에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영의 아들 디모데 목사에게도 이 부부에게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 4:19). 이 부부만큼 바울 서신에서 자주 언급된 부부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동역자들(sunergou,j, fellow workers)는 우리말 번역이 너무 잘 되어 있습니다. 사역을 함께 했던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평신도이지만 바울이 동역자라고 한 것은 그만큼 이 부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이사할 때마다 자신의 집을 열어 바울의 안식처가 되게 했습니다.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5절에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든, 에베소에서든, 로마에서든 어디를 가든지 이 부부의 집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집을 완전히 개방하여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대접하고 섬겼던 것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하여 얼마든지 희생하겠다는 열정과 사명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직업은 단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바울이 이 부부는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그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4절). 무슨 뜻입니까? 바울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을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요, 교회를 위하는 것이요, 복음을 위한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부를 생각할 때 비록 바울의 사역이 힘들었어도 행복하였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이 부부에게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목회자에게 이런 부부가 있다면 목회가 힘들어도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목회자가 얼마나 이런 부부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까? 아니 이 부부도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존경하고 사랑할만한 목회자가 있었다는 것이 행복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에게 사도 바울이 모델이라면, 평신도들에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모델일 것입니다. 저의 간절한 바램이 남은 사역을 바울처럼 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처럼 되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바울은 5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처음 전도해서 결실한 사람이 에배네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로마로 이사 가는데 연결시켜 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가 로마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신앙이 잘 자라가는 것을 보기 원했던 것입니다. 신실한 파트너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수고한’은 과거 시제입니다. 아마 이 마리아는 젊었을 때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는데 이제는 늙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옛날의 봉사를 다 잊어버릴 수 있으니 반갑게 맞고 성도로 합당한 예절로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7절)고 합니다. 사실 바울의 친척 중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늘 바울의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보다 먼저 예수를 믿은 것으로 여겨지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믿음이 좋아 사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고, 바울처럼 함께 감옥에 갇혀 고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이런 친척이 있었다는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10절)고 했는데,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는다는 뜻은 그냥 평범한 의미가 아니라, 믿음 때문에 잡혀가서 엄청나게 핍박을 받고 죽음 문 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난 경우입니다. 이런 분들의 몸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고, 그 믿음을 인정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여러 파트너들에게 로마교회가 문안하라고 명한 다음에,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절)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사랑의 인사를 하라고 명하는 것은 종종 바울의 서신 끝에 나오는 부탁이었습니다(고전 16:20; 고후 13:12; 데살전 5:26). 로마인들은 악수만 했던 모양입니다만, 바울은 유대적인 의식으로 입맞춤의 인사를 하라고 합니다. 물론 문화적인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오늘날도 양 볼에 입맞춤을 하는 것이 인사이며, 미국 사람들은 주로 포옹(hug) 아니면 악수이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맞절일 것입니다. 에스키모인들은 코를 비빈다고 하며, 아프리카 정글 사람들은 팔꿈치로 서로 찌른다고 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파트너라면, 동역자라면 어떤 모양이든지 반가운 사랑의 인사는 있어야 합니다. 포옹을 하더라도 거룩한 포옹의 인사입니다. 언젠가 인사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어르신들은 후배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몹시 언짢아 하십니다. 버릇이 없다고 하시든지 아니면 부모들이 교육을 잘못시켰다고 꾸중하십니다. 이유는 인사하는 것이 어른을 존경하는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예기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파트너라면 서로 사랑의 인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정말 반가움을 표현하는 인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etiquette, courtesy)로서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것이 잘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서 그런가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하지만 정말 고쳐야 할 중요한 삶의 영역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서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파트너로, 동역자로 불러주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집사 뵈뵈처럼 교회의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사람과 목회자를 잘 돕는 보호자가, 후원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목회자와 함께 일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신다면 그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기에 목회자를 사랑하며, 쉽지 않겠지만 생명을 내건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분을 위하여 목회자가 얼마나 기도하겠습니까? 아니 목회를 마칠 때, 이 세상을 떠날 때 기억되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예수님 만날 때 그런 평신도에게 얼마나 큰 칭찬과 상이 있을까요? 주님과 목회자에게 인정을 받는 일군이라면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파트너임을 잊지 말고, 늘 사랑의 인사를 나누며 격려하며 주님의 교회를 잘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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