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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3-16 (목) 10:5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86    
참 성도의 인내와 믿음(계 13:1-10)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정말 세상의 그 어떤 선물보다 귀하고 소중한, 아니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귀한 선물을 잘 간직해야 합니다. 빼앗기면 안됩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이 선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시험해 보실 때가 있습니다. 정말 구원 받은 믿음인지 시험해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지키지 못하고 빼앗긴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 믿음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빼앗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요 10:28-29).

오늘 본문에 한 짐승이 나옵니다. 큰 권세를 가진 짐승입니다. 그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에게만 돌아가야 할 영광, 이름을 자기에게 돌리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들을 핍박하며 죽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본 이 짐승이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괴상하게 생겼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1절)고 하였습니다. 이 짐승을 이렇게 묘사한 모습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뿔이 열이라는 것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뿔에 왕관, 면류관을 썼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뿔은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제단의 붙어 있는 뿔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또 머리가 일곱이라고 했는데 지식, 지혜가 뛰어나다는 뜻입니다. 권력에다가 지식과 지혜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머리들에 참람한 이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참람한 이름들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야 하는 이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전지전능하신 분’ ‘지존하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 등 말입니다. 사람에게 돌려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칭호들이 이 짐승에게 있더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바다의 용이 그 권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2절)고 하였습니다. 이 짐승은 표범의 몸과 같이 신속하게 움직입니다. 곰의 발 같이 적을 공격할 때 일격에 쓰러뜨립니다. 사자의 입처럼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다니엘의 환상에서도 나타났는데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같이 유다를 대적하는 제국들을 상징했습니다(단 7장). 정치 군사적으로 막강한 세력들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 시대에는 바로 로마제국을, 그 황제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 적용하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로마 카톨릭이었구요. 오늘날에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입니다. 이 모든 권력의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탄이 로마제국 황제들의 마음을 극도로 교만하게 하여 자신들을 신격화시켜서 사람들로 자신들을 숭배하게 한 것입니다.
로마가 이렇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3-4절)고 말입니다.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상처가 나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로마제국이 네로 황제가 죽은 후에 잠시 주춤하던 권세가 회복이 되어서 줄리어스 시저와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지면서 내적인 갈등을 회복하고 무력으로 전세계를 정복한 때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때 로마는 평화로워서, 라틴어로 Pax Romana(Roman Peace) 라는 말이 유행했었습니다. 그 권력이 무서워 사람들이 꼼짝 없이 복종하기에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로마를 대적할 나라가 없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용과 짐승을 경배했습니다. 로마황제 숭배가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성도들을 엄청 박해했던 것입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6-7절)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성도들을 죽이면서 그들 속의 죄성을 발산하며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대항하면 분노를 쏟아내며 로마의 평화를, 영광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적 그리스도의 활동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믿는 자들의 신앙이 참인지 거짓인지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8절)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즉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짐승의 박해가 얼마나 심한지 진정으로 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가 아니고는 다 짐승에게 절하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러한 무시무시한 고난은 참 성도와 가짜 성도를 구분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신 스스로 믿는 자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참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양과 염소를 골라내신다는 말입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만이 참 성도이며, 참 성도는 절대로 이런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역경이 있어도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은 구원 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후에 참 성도답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저 교회만 다니면서 제자리 걸음을 할 뿐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후에 다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선물이 정말 귀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선물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삶이 다릅니다. 이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목적지가 달라졌고, 가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임했습니다. 그 큰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요일 5:13)고 하였습니다. 내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얼마든지 이깁니다.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이깁니다. 절대로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고난을 통하여 그 신앙이 더욱 강해집니다. 이유는 눈에 보이는 고통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물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참 성도라고 해서 전혀 두려움이 없고, 마음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잠깐 흔들리다가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 구원의 선물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 편으로 결단이 섭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새로워지고 힘이 생깁니다. 어떤 육체적인 고통도 이겨낼 용기가 생깁니다. 왜냐면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줄 때에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난은 잠깐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은 영원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깐의 고통 때문에 그 영원한 영광을 포기한다면 너무 큰 손해이며 부끄러울 뿐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절) 합니다. 계시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약해져서 짐승에게 절하려 한다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 없는 자이니, 그 우상에게 절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하여 이겨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주님의 심판이 곧 있기 때문입니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0절)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을 사로잡고 칼로 죽이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한 자들을 결국 심판하십니다. 자기 자녀들을 그렇게 괴롭히고 죽인 사탄 마귀의 하수인들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42개월만 허락된, 즉 잠시 동안만 활동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5절). 이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알고 믿는 성도들은 인내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분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을 너무 경솔히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의를, 사랑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무시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안 믿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낫겠지 하고 교회를 다닙니다만, 복음 때문에 희생하고 손해를 보며 어려움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저 받았다고만 생각해서 그런지 그 가치를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자기에게 이익이 안되면 신앙을 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잘 살기 위하여, 세상 재미 때문에 얼마든지 신앙을 버립니다. 이런 신앙이 진짜입니까? 결코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 없습니다.
참 신앙은 구원은 거저 받았지만, 그 구원의 선물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잘 깨닫고 있기에 이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꾸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다 합한다 해도 구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7)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말씀하신 후에, 망대의 비유를 드시면서 어느 사람이 망대(tower)를 세우려 할 때에 준공하기 까지 그 비용이 얼마가 들겠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눅 14:28-30). 그렇게 하지 않고 무작정 시작하면 기초만 쌓고서는 세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자로서 주님을 따라갈 때에 어떤 대가도 지불할 마음이 있는 자라야 참 성도, 주님의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유혹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가볍게 여기고 세상을 따라가게 할 때 그 유혹들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가 참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재림이 가까워올수록 사탄 마귀는 적 그리스도를 앞세워 큰 권력을 휘두르며 우리를 핍박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가면을 쓰고 다가와 우리를 유혹하며 시험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다시금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인지를 말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의 잠시 잠깐 있는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참 성도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주위에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있기에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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