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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8-10-29 (수) 04:3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284    
[10/26/08] 개혁주의 교회
오늘은 1517년 10월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 정문에 잘못된 천주교 교리의 95개 조항을 붙임으로 전 유럽에 개혁의 불을 당긴지 491주년을 맞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루터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1505년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그 해에 친구와 함께 비를 피하려고 나무 밑에 있다가 옆에 있는 친구가 벼락을 맞고 죽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부로서 수도원 생활 중 공부하여 1512년에 신학박사가 되어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로마서 강의를 위하여 연구하다가 로마 성당을 순례하는 고행 길에 소위 빌라도의 사닥다리의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던 중,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는 구절에 은혜를 받고, 기어 오르던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 선한행위로,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하여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 토론을 위한 95개 논제를 내걸었던 것입니다. 그 핵심은 과연 로마 캐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가 옳은 것이냐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캐톨릭 교회는 웅장한 건축물인 로마 베드로 대성당의 준공이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자 교황과 대주교는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텟젤을 시켜 면죄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돈으로 사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천주교 신부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생활이 성경이 진실로 가르치는 진리로부터 벗어난, 잘못된 교리에서 나온 것임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 파렐은 "종교개혁가들이 로마 카톨릭을 비난한 것은 잘못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보다도 잘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의 횃불은 불과 4주 만에 독일을 휩쓸었고 8주만에 전 유럽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의 모든 교회와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은 무엇이었을까요?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사상을 네 가지 모토로 정리해 왔습니다. 적어도 개혁주의 장로교회를 다니는 여러분들이 꼭 알아야 할 네 가지 모토를 살펴보며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 로마 캐톨릭은 이미 성경을 따르는 신앙과 행위의 기준에서 멀리 떠나있었습니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했으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해석은 어머니 교회인 로마교회가 정한다고 함으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개혁주의자들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사실 면죄부 판매 역시 로마교회의 그릇된 성경관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교리와 윤리 규정들을 로마교회가 마음대로 법제화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종교개혁가들은 성도의 신앙과 모든 행위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오직 성경’을 선언한 것입니다(딤후 3:16-17). 이런 의미에서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교인들은 항상 오직 성경으로 개혁하는 교인들입니다. 성경을 우리 삶의 최고 권위로 여기는 교인들입니다.

둘째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입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인간의 원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해결되고, 그 후에 짓는 자범죄는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 함으로 용서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죄는 완전면죄부(plenary indulgence)를 사서 해결 받고, 사소한 일상적인 죄는 부분면죄부(partial indulgence)를 사서 용서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선함이 남아 있어서 인간의 노력으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사죄나 구원은 돈이나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오직 은혜’를 선포했습니다(엡 2:8-9). 특히 루터는 바울의 고백인,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아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19,24)고 한 것 같이, 자신의 모든 의지와 행위가 철저하게 죄에 속박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가르치던 중에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살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셋째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입니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협력 사역이며, 성례는 구원의 도구이므로 죄인이 회개만 한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가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오직 믿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서론에서 살펴본 로마서 1장 17절에도,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루터는 구원이 은혜로만 가능할 뿐 아니라,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교인들은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요, 인간의 노력이나 선한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을 확신하는 교인들입니다.
이런 진리에 비추어보면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 기독교 전 교리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넷째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까지 선물로 주신다면 당연히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로마 캐톨릭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이나 대주교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든 영광을 받았습니다. 마치 그들이 구원을 주는 것인 양, 인간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은 양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알고 믿었으며, 앞에서 언급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살았기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은 평신도들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16세기 이후의 신학자, 설교가, 사상가, 정치가, 사업가, 교육가, 예술가 등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예를 들면 음악의 존재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주장했던 바하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표지에 ‘S.D.G.’를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바로 ‘Soli Deo Gloria’ 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 라고 함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고, 주님께서 주장하시고, 결국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기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만 돌릴 것을 기록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사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 자체를 통해 특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교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참 하나님 되시게’ 모든 일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이러한 종교개혁 운동이 영국에서 국교회의 형태로 자리매김을 하며 또다시 부패하여갈 때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을 원했던 무리들에 의하여 영국과 스콧틀랜드, 화란에서 청교도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청교도 운동은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사상에 근거한 실천적 삶을 추구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중심의 신앙과 교리, 예배와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죄인이 구원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은혜로 주어진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어떤 종교의식에 있지 않다고 주장함으로 다시금 로마 캐톨릭과 영국국교에 도전하였습니다. 한편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행할 인간의 책임을 크게 강조하였습니다(엡 2:10). 그것은 주일성수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윤리 생활과 자녀들을 철저하게 청교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핍박을 피하여 미국에 온 청교도들에 의하여 사실상 미국이 건설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을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나라를 세우기 원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활동이 전개되는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짓기 전에 교회와 학교를 먼저 세우고, 교회를 중심으로, 주일을 중심으로 저들의 삶을 영위해 나갔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 젖은 미국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부인하며,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봅니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던 왕의 권위를 시민의 힘으로 붕괴시켰다는 것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왕정에서 공화정 혹은 민주주의로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 사건은 그 때까지의 사람들의 사고체계를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초자연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믿던 시대였습니다. 비록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절대적인 존재의 실체를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기본 사상을 제공한 철학자 칸트의 1770년대의 논문으로 인한 이성주의, 계몽주의 등장으로 모더니즘 시대를 맞습니다. 칸트는 경험과 인식의 통합이라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인식될 수 없는 존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교도 부모 아래서 자란 칸트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가 인식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냄으로 그 후 철학의 방향을 칸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통해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과학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함으로 ‘불가지론’(Agnosticism)의 문을 열고, 그 자리에 과학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대체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향이 기독교에 심한 타격을 주었는데 무엇보다도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하던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인식 아래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됩니다. 그 결과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하시고 계시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어서 성경에 대한 각종 비평이 확산됩니다. 그래도 이 모더니즘, 계몽주의 시대에는 절대주권자에 대한 추구는 포기했지만 인간 사회의 최소한의 유지를 위해 하나님의 필요성에 대하여서는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20세기 들어와서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으로 인하여 과학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장밋빛 환상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들은 허무와 절망감 속에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더니즘 시대 이전에는 초자연적이고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그 진리를 믿는 시대였다면, 모더니즘 시대는 그 초월적인 진리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믿는 시대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절대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린 시대입니다. 아니 진리를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가 보더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합니다. 대신 개인이 스스로 창조해내는 상대적 진리를, 주관적 진리를 인정합니다. 확실히 내가 느껴지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합니다. 허무와 절망으로 요약되는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슨 초월적이고 거창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나의 존재감’ 입니다. 철저하게 인본주의, ‘나’ 중심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서 느끼는 존재감을 최대한 채워주는 것이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질문이 무엇이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대체됩니다. 내게 더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이고 진리입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받아들일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사람은 관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를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은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에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감히 내가 틀렸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는 타인이 어떻게 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한다는 말입니까? 나에 대해 판단하는 사람은 나 뿐입니다. 내가 신(god)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각자 신(god)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뉴 에이지 운동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개혁가들이 외쳤듯이 오직 성경만이 진리입니다. 사실 진리라는 말 자체가 갖는 의미는 유일하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상대적이고 포괄적인 것이 진리일 수가 있습니까? 너도 옳고, 나도 옳은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길은 오직 성경을 붙드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하신 하나님 말씀의 역사성, 진실성을 소홀히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우리를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가들이 타락한 로마 캐톨릭에 대항하여 개혁을 부르짖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하여 개혁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으로라는 모토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해 가면서 이런 캄캄한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하여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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