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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4-25 (일) 01:2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65    
감사, 참 믿음의 증거 (눅 17:11-19)


우리 모두 겪어 보았듯이 우리는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자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을 품고 불평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평만 하는 사람은 상대하기가 싫지 않습니까? 그러나 늘 감사하며, 작은 은혜조차 감사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 은혜를 베풀며 돕고 싶은 것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인격적인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은혜에 늘 감사하며 찬송하는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정말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살고 있습니까? 은혜를 입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물론 가장 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게 늘 감사하고 사시나요? 아니면 조금만 힘들어도 감사는커녕 불평하며 원망하십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 라고 간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참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 있다면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크신 분이요, 위대한 분이기에 그 믿음이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역사하는 힘이 엄청 크고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 크신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종’이기에 마땅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인이기에 종의 삶을 책임지니까 종의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시며, 자신에게 속한 종이니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참 믿음의 증거(evidence) 하나를 가르쳐줍니다.
우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1-12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 여행길이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고 하는데, 아마 갈릴리 남부지역과 사마리아 북부지역 사이의 경계를 지나가신 듯 합니다. 아니 어쩌면 요단강 서쪽 사마리아 지역으로 지나가셨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자신들 마을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참고- 레 13:46; 민 5:2). 사회와 격리되어야 할 그들이었기에 사마리아 한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멀리 서서 예수님에게 소리를 지른 이유는 그들과 조금이라도 접촉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레 13:42-46).
그들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절) 합니다. 여기 ‘선생님이여(evpista,ta, Master)’의 정확한 번역은 ‘주님이여’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게만 사용된 단어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주님에게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달라’는 말씀은 동정심을 가지고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고쳐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마 4:23-24절상)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침을 받고 싶어서 소리를 높여서 부르짖을 수 밖에요. 이미 누가복음 5장에서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린 자가 예수님을 보고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12)라고 한 자를 예수님께서 안수하여 고쳐주신 적이 있습니다(13절). 그 때도 소문이 더욱 퍼져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께 나온 적이 있습니다(15절).
본문에서도 부르짖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상)고 하십니다. 이미 병을 고쳐주시기로 하신 예수님은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문둥병이 나은 것을 보고 판단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진단을 받고 나은 것이 확인되어야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레 13장). 10명이 모두 다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절하)고 하였습니다.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여종의 말을 듣고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을 때에 그의 문둥병이 나았던 것처럼 말입니다(왕하 5:8-14). 10명이 얼만큼 가다가 고침 받은 것을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5-16절)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며 살다가 고침 받은 것을 알고는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에게 너무 감사하여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우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감사)하며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10명 중 9명은 유대인이었고, 1명만 사마리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고쳐준 예수님 생각은 없고, 속히 가서 제사장에게 인정 받고, 가족 친지들을 만나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유익만 생각할 뿐입니다. 누가 고쳐주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고침 받았다는 사실만 중요하고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라고 하십니다. 아마도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내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않아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아 병이 낫게 되었으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때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하며 찬양할 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그들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고 돌아와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마리아인에게 하는 말씀을 보십시오. 엎드리어 경배하며 감사하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절)고 하셨습니다. 여기 “구원하였느니라”는 우리말 번역이 제대로 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는 “your faith has made you well”로 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의 믿음이 병을 고쳤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만 참 믿음이 있었기에 육신의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훨씬 중요한 영혼의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즉 10명 가운데 참 믿음을 가진 자는 1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율법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감사하며 엎드려 예수님을 경배하였던 1명 말입니다. 당시 보통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사마리아인들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자신을 계시하며, 그녀를 통하여 생수의 복음이 전해져서 그 여인의 사마리아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요 4장).
또한, 여기 ‘구원하였느니라’의 원어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 때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9명은 문둥병은 고쳤어도,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냥 자신들의 병을 고치기만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유익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습니까?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하여, 자녀들이 복을 받기 위하여,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아니면 부딪힌 각종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를 찾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얼마든지 그런 인생의 문제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복을 받기 원하는 것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으로 온 다음에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참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참 믿음이 없어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엎드리어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찬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참 믿음으로 부르시는데 응답을 하지 않으셔서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자들은 참 믿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별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영원한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일반 계시(은총)에 대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설교 중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해를 비취시며, 비를 내리시며, 공기를 허락하시며, 아름다운 대자연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반 은혜(은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에게 특별한 은혜(은총)을 입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일반 은혜(은총)도 감사하지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죽었다가 살아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430년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의 이적을 베푸셔서 그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와서 죽게 생겼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하였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또 경험하고 광야에 들어와서도 먹을 것이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래도 먹을 것을 주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했어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대면하여 율법의 말씀 십계명을 받아 내려오는데 40일을 기다리지 못하여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서 먹고 떠들며 춤추며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모압의 우상신까지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불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의 기적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것인가요? 인간이 이렇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집니다.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마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에서 온 편지’라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이 바보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터무니 없을 정도로 감사할 줄 모르나. 이상할 정도로 감사할 줄 모른다. 사실 나는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정의가 감사할 줄 모르는 두 발 달린 짐승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불신앙의 죄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는 고침을 받은 10명 중에 1명만 예수님에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며, 경배하였습니다. 1명만 참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니 참 믿음이 없으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늘 불평불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침을 받아,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평과 불만, 걱정과 근심이 몰아져도 죽었던 나를 살리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함께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예배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 5:18)고 하였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청교도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Matthew Henry는 ‘감사는 더하기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더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고난 중에 있으십니까? 감사할 제목들을 생각해보시며 감사하십시오. 구원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이 시간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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