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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7-01-09 (월) 23:1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39    
고난 후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자(2)(골 1:24)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더 행복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병 고침을 받고, 자녀들도 잘되고, 직장생활이나 사업체도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문 것입니다.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 주위 환경이나 상황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어느 경우엔 더 안 좋아진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인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던 것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더 괴로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시험을 받고 상처를 받습니다. 즉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다 좋은 일만 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많은 문제들을 직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믿기 전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았고, 그러한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그 후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고 잘 참고 인내하라고 하였습니다(롬 8:18). 잘 참아 내려면 첫째 내가 누구인가(골 1:13, 21)를 잊지 말고, 둘째 내가 왜 사는가(골 1:22-23) 그 사는 목적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그 고난의 실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였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을 위하여, 교인들을 대신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지금 감옥에 갇혀 고난을 받고 있는 바울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당하신 고난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 때문에 받는 여러 가지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존재론적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아직 불완전한 인생들과의 만남 속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기쁘게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사상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과는 세계관(worldview)이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릅니다. 인간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자연과 사회, 역사와 문화를 보는 눈도 다릅니다. 우리의 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교회(성도)의 주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인본주의로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본주의, 즉 하나님 중심으로 삽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그들과 다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핍박합니다. 기독교 2000여 년 역사상 세상은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을 엄청나게 죽였습니다. 북한과 모슬렘 권에서는 지금도 신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윤리 도덕과 우리 믿는 자들의 윤리 도덕도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른 윤리 도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욕을 먹고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의 윤리 도덕적인 삶은 세상에서 유익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거룩함의 추구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껏해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양심을 지키고 살 뿐입니다. 문제는 그 양심이 무디어지고, 쉽게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goodness)’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항상 참된 것이며, 정직한 것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누가 행한 것이 사람들 보기에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동기가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라면 그것은 정말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연하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엔 불의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도 우리가 순수한 믿음으로,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자체의 불완전한 모습과 모순을 보고 세상은 비난하고 조롱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사탄 마귀는 교묘한 궤계를 사용하여 세상과 교회가 별로 다른 것이 없이 비슷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세상과 타협하며 적당히 믿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하는데 아군과 적군이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교회(교인)들은 세상이 주는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교회 밖에서 생활하시면서 세상이 주는 괴로움이 전혀 없다고 하면 여러분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과거에 자신은 마땅히 죽어 지옥에 갈 존재임을 알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비참한 인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어두운 이 세상의 빛의 자녀로 살라고 이 세상에 남겨둔 것을 깨닫고 삽니다. 고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믿음으로 세상과, 마귀와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으로부터도 옵니다. 교회의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다 불완전합니다. 이 불완전함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불완전함과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불완전함 때문입니다. 우선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 혹은 진리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 보다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교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해야 하는데, 자기 판단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거나 오히려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또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공동체인데, 그 사랑이 항상 충만하지 못합니다. 사랑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믿음에서 멀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믿음의 진보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꾸 하나님을 멀리 하는데, 어떤 분들은 믿음에서 좀 떨어져 나갔다가도 말씀의 은혜를 받고 회복이 되어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인들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같은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는 은혜 가운데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은혜에서 물러나 잘못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은혜가 떨어져 잘못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성숙한 사람이 나는 잘못이 없어도 잘못한 사람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사랑으로 용납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교회 안에서 행복하지요. 은혜가 떨어져 잘못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많을 때 점점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완전한 사랑 때문에 때로 교회 안에 분쟁이, 다툼이 있습니다. 그래서 분열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쟁의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기심, 교만 혹은 현실만 보는 안목 때문입니다. 이기심은 자기를 모든 일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 둘이 만나면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보다 몸된 교회를 먼저 사랑하고, 교회 전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생각해야 하는데 자신의 유익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으로 자기가 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가장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는, 가장 영적으로 바로 서있는 교회는 교인들이 첫 사랑을 기억하며 진정한 회심의 반복적인 경험에 의하여 자기가 깨어지고, 주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교회입니다. 자신보다 교회를, 교인들을 더욱 사랑하여 자기는 손해를 보더라도 더 많은 짐을 지려고 하는 교인들로 가득찬 교회입니다.
그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하면 불가능합니다. 늘 나보다는 남을 낫게 여기어 진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분은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교만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교만은 빛을 발하여야 할 몸된 교회를 어둡게 합니다. 교만은 전혀 쓸모없는 소금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벧전 5:5). 그래서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요 멸망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잠 16:18, 18:12).
또 교인이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이유는 눈 앞의 현실만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싸울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다 일시적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음에 자기 욕심이 생기게 되어 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그의 마음이 영적인 일에,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영원의 관점에 보고 오늘을 살 때 참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제일 상처를 많이 주고, 많이 받고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기심, 교만, 영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데 나는 그렇지 않은데 교인들 가운데 이렇게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일시적인 현실만 따지면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고 내가 그런 사람을 잘라 내버린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몸 전체가 아픈 것입니다. 아니 그 때 가장 고통을 많이 느끼는 분은 머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오히려 그런 분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감싸고 위하여 기도하면서 우리가 더 낮아져 섬긴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분들에게 임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힘들지만 주님을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은 우리들의 사상이나 가치관, 세계관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고난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도 완전하지 않기에, 아니 나도 완전하지 않기에 교회 안에서 완전해지려고 잘 믿어보려고 하면 괴로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괴로움을 오히려 기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하여 나와 몸된 교회가 보다 더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더욱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고난을 잘 해석하면 믿음이 더욱 자라가게 됩니다.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주님이시라면 고난을 감당하게 하실 이도 주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로 고난을 극복할, 오래 참고 견딜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몸된 교회를 사랑할 마음을 주십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내가 참여하는 특권(롬 8:17)을 누리고 나의 앞에 영광스러운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괴로움이 없다면 우리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힘쓰고 애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심과 교만을 버리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 자아가 깨어지지 못했다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본문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는 말이 육신을 자꾸 쳐서 옛 사람의 모습, 죄성으로 인한 행실을 죽인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육체를 쳐서 마땅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겠다는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과 교회가 점점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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