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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1-28 (월) 05:4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47    
서로 사랑하는 모임(요 13:34-35)


어느 무명의 외국 시인이 말하기를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 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터툴리안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에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불신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 위하여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어느 다락방에서 최초의 성만찬을 베푸시며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다음 날이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 강령인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사랑하라’는 말은 56번 나옵니다. 그 중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설교부터 부활하시기까지, 13장부터 21장 사이에 44번(약 80%)이 나온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해를 맞아 첫 구역모임을 갖게 됩니다. 올해 첫 수요예배 때 구역장님들과 권찰님들이 많이 참석하셨기에 구역모임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구역모임은 예배 형식보다는 삶을 나누는 모임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구역 또한 작은 교회로서 교회가 그래야 하듯이, 구역모임도 ‘서로 사랑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또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모임의 본질, 가장 중요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는 말씀은 처음 새로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레 19:18; 마 22:39) 하신 계명과 비교해 볼 때에 새 계명의 사랑에는 차이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이 계명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옛 계명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표준이 됩니다.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은 주님의 사랑이 표준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즉 우리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렇게 주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냥 이 명령을 한 것이 아니라, 본문 앞에 나오는 실천하는 사랑의 예를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요 13:3-17). 즉 주님께서 가르쳐준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곧 자기를 배신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절)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배신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조차 용서하고 용납하는 사랑입니다. 그들조차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사랑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35절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였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룬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터툴리안 교부의 말과 같이 말입니다. 또한 20세기 유명한 신학자이며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미국에서 장로교 목사로 10년을 사역했던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제자의 배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도 그들의 신에게 기도 많이 합니다. 기도가 제자의 배지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달하여, 성경 지식이 많아도 그것이 제자의 배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면서도 성경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서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 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사랑을 나타내기 쉬운 작은 공동체인 구역에서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의 어떤 모임에서든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말할 것이며, 그들도 그런 사랑을 받기 원하여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랑은 전도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흔히 우리는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삶을 통하여, 생활 속에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물론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마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이야기 할 때에 무인도나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양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듯, 참 사랑은 마음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삶을 보면 그 사람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인관계 속에서 말입니다.
결코 사랑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신 교회를, 성도를, 이웃을, 구역 식구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산을 옮길만한 놀라운 믿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고, 심지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 주더라도 사랑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또한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시끄럽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자체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는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데에는 희생이 들지 않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것 같은 희생임을 압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라고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즉 추상명사인 사랑을 역동적인 동사로 표현하자면 ‘희생하다, 내어주다, 감당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물론 육체까지 잡혀주는 것,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움, 다툼, 원망 등 모든 것을 이겨내고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천체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관찰해 보면, 그냥 눈으로 볼 때는 어렴풋이 작게 보이는 별들도 망원렌즈를 통해보면 눈 앞에 있는 듯 형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을 용서하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매일 묵상하여야 합니다. 십자가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곳은 없습니다(롬 5:8). 앞에서 언급한대로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제 그들에게 곧 다가올 육체적 위기, 정신적 위기, 영적 위기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잘 견디게 할 수 있는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오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 남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이 ‘사랑’ 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이미 다가오지 않았습니까?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삶을 통하여 드러내며 살아가기 원한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순간 사랑하다가 끝나 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한 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힘입고 의지적으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렇게 사랑하리라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감정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아니 미운 대상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사랑과 믿음은 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 분을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 감동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나요? 사랑의 첫 단계는 관심입니다. 관심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고 하였습니다. 여기 ‘서로 받으라’는 원어적 의미는 어떤 사람이나 무엇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라온 배경이 다르고, 생김새와 성격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다르고, 심지어 신앙의 색깔이 조금 달라도 우리는 서로 받아야 합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기 보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죄인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마음에 드는 그 무엇이 있어서 받아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전혀 모르시는 분이 죄로 가득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이 있어서, 예쁜 데가 있어서 받아주는 것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수용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빌고, 회개하면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회개하기 전에 사랑하며 받아주고 나서, 회개하도록 도우십시오. 사실 우리의 회개도 그 큰 사랑을 깨닫고 나서, 내 죄가 얼마나 많고 큰지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의 가족을, 이웃을, 우리의 구역원들을, 성도들을 주님처럼 받아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받아주는 자세가 바로 위로, 혹은 격려입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은 참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로 힘들어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힘들고 어려운 인생살이에서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헨리 나우엔은 그의 저서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위로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한다. 위로는 고통을 없애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라는 의미의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 모두는 위로를 주고 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늘 왜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지, 구역으로 모이는지 그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의와 나라를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라면,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이웃을 주님처럼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기쁘게 하는, 내 기호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남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넘치는 우리 교회와 각 구역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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