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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03-28 (토) 20:06
분 류 주일설교
첨부#1 20200329_이번_주_설교.doc (79KB) (Down:14)
ㆍ조회: 1117    
믿음이 있다면 (빌립보서 4:4-9)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장 큰 문제가 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는 ‘기억하라’ 혹은 ‘잊지 말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매 순간 이 사실들을 잊지 않고 산다면 정말 믿는 자로서 기쁘고 즐겁게 주님을 증거하고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어렵고, 불편함 가운데 산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과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이 확실히 존재함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신 지존자이시며, 전능하시며,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주권자 여호와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으며(시 91:1-2),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믿음이 있는 자라면 나타나야 할 모습들을, 믿는 자의 삶의 태도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belief)은 곧 신뢰(trust)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있다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자주 반복이 되는, 이 서신 전체의 주제가 되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데살전 5:16). 무슨 일 때문에 잠시 잠깐 기쁨을 빼앗길 수 있어도 금방 다시 주님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게 기쁨이 사라지고 불만과 불평이 지속될 때는 믿음이 역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 평안(peace)이 사라지고 불안(anxiety)이 내 삶을 주장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이 말씀은 만약 기쁨이 회복이 되지 않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서 기쁨을 회복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 죄를 지어서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고백함으로써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생겼으면 기도하면서 형제를 만나 진솔하게 대화를 통하여 풀어야 합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내 안에 기쁨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 때문에 내 기쁨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잘잘못이 아니라 내 안에 기쁨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내 마음에 있어야 할 기쁨과 평안 대신에 슬픔과 분노, 불안이 있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잘못을 밝히기 위해 내 안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마치 쥐를 잡으려다가 장독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그 때는 차라리 ‘나는 저 사람의 정확한 사정을 잘 모른다. 저럴 수 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이겠지’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넘어가야 합니다.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간섭하심이 있겠지’라고 여기는 것이 “주 안에서” 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든 게 어려워지고, 자신이 감염될까 겁내면서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나 원망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믿고 여기는 것이“주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관대함(generosity), 친절함(gentleness)을 뜻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관대하라’는, ‘친절하라’, ‘손을 내밀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기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때로는 서로의 발전을 위해 잘잘못을 가리거나 지적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의 영에 사로잡히면, 사탄의 영에 유혹되어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하셨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속히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조심하면서, 그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문 앞에 Grocery 라도 봐서 갖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어떤 사소한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 세상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우리 삶을 연주하는 연주자, 혹은 경주자와 같습니다. 한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연주를 그만두거나, 경주를 멈출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두 번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을 다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게 되니 그 때가서 판단 받도록 하고, 지금은 그저 기뻐하며 허락하신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뻐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요, 또 하나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다면 문제에 부딪쳤을 때에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고 하였습니다. 불안해하며, 불평과 불만과 의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기도를 하더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아래 있음을 믿으며, 그의 전능하심과 약속의 말씀을 믿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되면 모든 염려와 걱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신다고 하였고(빌 4:19),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다 아시고 계시고(시 139:3),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고 했고(벧전 5:7), 우리 하나님은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고 그 지혜가 무궁하다고 하였습니다(시 147:5). 사탄 마귀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전염병의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신다고 하였습니다(시 91:3). 이러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는다면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연약해서 작은 문제에도 염려와 불안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 그 내용을 말씀 드리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맡기라고 합니다. 6절에서 바울이 말한 ‘기도와 간구’, 그리고 ‘아뢰라’는 각각 의미가 비슷합니다.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비슷한 뜻의 단어를 계속 열거한 것을 보면, 염려, 근심과 걱정이 찾아올 때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사실 믿는다 하면서도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나빠질까 염려하는 것이지요. 물론 상황은 얼마든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지금보다 더 못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당면한 문제를 마치 남의 문제처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염려를 버릴 수 있습니다. 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라고 여기시며 기도하세요. ‘내 아버지가 하나님인데, 그 아들 문제가 곧 아버지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적절하고 정확한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려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불안한 마음과 잡생각을 믿음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셋째로, 믿음이 있으면 늘 경건한 덕목들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염려를 내려놓고 감사함으로 기도한 후에, 점점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즉 사고방식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선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한지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떻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들을 칭찬할만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는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찬양 받으실 것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 생각처럼 단순하거나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큰 뜻을 알기 어렵거든, 작은 일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는 것인지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어떤 형편이나 처지에 상관없이,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를 만났을 때 말입니다.
유명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설교를 강해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은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잘 관찰하고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성경은 아주 논리적이다. 우리는 믿음을 무슨 허무맹랑한 전설이나 신화를 믿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우연히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닥치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결론을 내보라. 들의 풀과 백합화를 보고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공감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을 깊이, 많이 하니까 염려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생각을 올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염려 자체만 놓고 많이 생각 하거나, 공상 즉 쓸데없는 생각이나 망상 즉 허무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생각을 올바로, 논리적으로 깊이 하면 없던 믿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인격적이라서 그렇습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올바로 하게 된 후에는 행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만 하고 맙니다. 결단한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9절)고 하였습니다. 산 지식, 참 진리를 배워서, 마음에 받아들이고 난 후, 체험적으로도 깨달은 것들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올바른 생각들, 무엇에든지 경건한 덕을 세우고자 하는 생각들을 실천으로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생각을 했으면 사실 당연히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고 주저하고 있다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도 때로는 이웃돕기 등 선행을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양심을 따라 악한 생각을 버리고 선한 생각을 하면 더러운 욕망이 가라앉으면서, 선한 충동을 따라 어느 정도의 선행, 덕행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죄성이 있기에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았다가 휘저으면 다시 더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믿는 사람 안에는 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이 믿는 사람들 속 마음에 역사를 합니다. 그래서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생각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아름다운 경건한 미덕들이 밖으로 표출됩니다. 물론 믿는 우리들이라고 해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놀라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노합니다. 잠시 염려과 걱정으로 불안해하며 근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방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생각하면 경건한 덕을 세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믿음이 있다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흑사병이 전 유럽을 전염시키며 확진될 때, 루터는 그의 에세이 ‘공포의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쳐야 하는가’ 글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성도들의 믿음이 연약하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똑 같은 짐을 질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성숙도에 따라 전염병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 베자 등 성숙한 믿음의 지도자들은 흑사병 감염이 무섭다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에 남아 불안과 공포에 떠는 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도망치는 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목사와 지도자들은 남아 감염된 환자들을 즉시 병원으로 격리하였으며, 병원에 목사들을 파송하여 죽어가는 환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하늘나라 소망으로 위로하였습니다.
요즘 인터넷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 하나님, 성경에 대하여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질문이 엄청 늘어났다고 합니다. Global Media Outreach 설립자인 윌슨은 ‘온 세상이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로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전례 없이 늘어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9 `11 사태 후에 많은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다고 하듯이, 이제는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복음을 전하기 좋은 시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으면서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어떻게 전도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 잠시 염려할 수 있어도 금방 믿음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할 것, 칭찬과 격려할 것, 무슨 덕을 세울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올바른 생각을 했으면 늑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프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에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소금 맛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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