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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8-09 (일) 20:1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6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참뜻 (눅 10:25-37)


교회를 좀 다니신 분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 중의 가장 큰 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이야기를 못 들어보신 분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정도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가장 기본적인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물리치며 기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0:17-20). 영의 눈과 귀가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라고 하시며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심을 기뻐하시고(눅 10:21-24),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시면서 제자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율법사 혹은 서기관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하)? 우선 물어보는 동기가 감히 예수님을 테스트하기 위함입니다(참고- 마 22:35). 트집을 잡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그 동안의 가르침이 거짓이며 약점이 있음을 드러내어 그에게서 사람들을 떠나게 하고, 유대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습니다. 유대주의자인 그는 아직도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얻는다(receive inheritance)’는 ‘상속을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든지, 모세와의 언약을 기억하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기업, 그 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은 율법을 지키고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이었어야 합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을 받는 것과 영육이 병들거나 귀신에 들린 것을 고쳐주시면서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눅 5:20; 7:9, 50; 8:48 등).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받는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라고 되묻습니다. 율법에 이 율법사의 질문의 답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를 깨우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신명기 6:4-5 과 레 19:18 말씀을 인용하며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마 22:37-40; 막 12:29-31)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말 하나님을 그렇게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면 영생을 받습니까? 그러면 앞서 가르쳐주신 복음의 진리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이론적으로는 만약 그가 이 가장 크고도 기본적인 계명을 완전하게 지킨다면 그는 영생을 얻습니다. 문제는 그가 완전하게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사람도 이 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함을 느끼고 회심하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하였고, 이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가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의가 임하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엡 1:13).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 2:8-9)고 하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4)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전가 되었다는 이 진리를 깨달으라고 예수님이 이 율법사에게 그렇게 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자기의 의를 드러냅니다. 못 깨닫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그렇게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다만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한 계명을 생각하며,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30절상). 지리적으로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17마일(27km) 떨어져 있으며, 예루살렘은 해발 600m 정도로 높은 지대인데 여리고는 요단강 쪽으로 무척 낮은 지대로 해저 260m 로 예루살렘에서 약 900m 이상을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는 길이 고개들과 계곡을 끼고 있어 대단히 위험하여 ‘피의 길(the path of blood)’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좁은 고개길 위 큰 바위 뒤에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려는 강도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 그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죽을 정도로 맞고, 옷과 있던 것 다 빼앗기고 기절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30절하).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31절). 또 한 레위인도 지나가다가 마찬가지로 피하여 그냥 가버립니다(32절).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유대주의 종교인들입니다. 나중에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면 죽은 줄 알고 그냥 지나갔다고 핑계할 수 있겠지요. 율법에 의하면 자신이 부정하게 될까 시신을 만지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까요(레 21:1-3).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 길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33-34절). 아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유대인일 것입니다. 자신과 상종하지도 않는 유대인이지만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저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 것입니다. 당시 감람유와 포도주는 오늘날 비상약(First Aid Kits)처럼 사용되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35절)고까지 배려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고는 그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율법사가 던진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어려움을 당한 자의 이웃이 되느냐 되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7절)고 하였습니다. 이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비를 베푼 자라고 합니다. 자신도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나름대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종, 정한 자와 부정한 자 등으로 계층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너도 그렇게 계층을 뛰어넘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자비를 베풀라고 하시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렇게 어려운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영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율법사는 그렇게 못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당시 몇 가지 율법을 지킨다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은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 하나님을 온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사실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오히려 이웃을 빼앗고 살인 강도 짓을 하곤 했습니다(호 6:9).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각각 다른 사고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강도는 내 것이 아닌 것을 훔치는 사람들을 말하며,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종교인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나 장로, 교회 지도자들 아니면 교회 일을 하는 권사, 집사로 불려지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똑 같은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웃들과 내 것을 나누고 살겠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성향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 보라고 하시는 것을 보고, 들으라고 하시는 것을 듣고 삽니다. 자기는 아직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성령을 받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참뜻은 문맥상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도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율법사에게 그것을 깨우쳐주려고 비유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도 없이 갔습니다. 있었다면 누가가 기록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음 문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 여러분!
정말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누구나 사랑하려고 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종이나 빈부나 지식의 계층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는 대상이 누군지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려고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믿고,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면 결단해야 합니다. 믿었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거스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겠다고, 하나님이 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들으라고 하는 것을 듣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고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누구나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사처럼 고정관념 속에 기피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했습니까? 사람을 보는 시각(perspective)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일까?’라는 질문보다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 누구에게 형제며 자매인가?’라고 묻고, 그 사람에게 사랑의 돌봄과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주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사랑의 수고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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