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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4-09-15 (수) 04:1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643    
[9/5/04] 통 찰 력
통 찰 력 (느헤미야 8:13-18)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통찰력(insight)을 소유한다면 그 사람은 삶의 어느 영역에서든지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런 통찰력을 지닌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에 놀랍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참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을 읽거나, 공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이해하고 깨닫는 것과 다릅니다. 통찰력을 가지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정말 은혜가 강 같이 흐르게 됩니다.
계속 느헤미야서를 강해하고 있는 가운데 그 중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처음 1장부터 7장까지는 느헤미야의 인도로 무너져 황폐하여진 채로 있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8장부터 14장까지는 성벽 재건을 마치고 에스라의 인도로 이제 그 안에 거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부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새롭게 말씀의 교훈을 받고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8장 1-12절까지는 드디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적 부흥을 체험하게 되어 회개하고, 기쁨을 회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이 이해가 되어지고 깨달아지면서 부흥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어지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깊게 통찰하게 될 때에 실제 큰 부흥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13절을 보면 “그 이튿날에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합니다. 전 날에 백성들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 회개가 일어나서 크게 슬퍼하며 애통하자,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더 이상 울지 말라고, 특히 오늘은 성일이니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9-11절).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그들의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튿날에 지도자들이 에스라 앞에 모입니다. “말씀을 더 밝히 알고자” 합니다. 깊게 통찰하고자 합니다. 지혜와 분별력을 얻기 원합니다.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태도입니다. 여러가지 사건들과 일들, 대인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지혜와 분별력으로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큰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앞 날을 미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비전을 생각하며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공부를 다하여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통찰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3년간 모습을 보면 때때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알아듣는 것 같아도 깊은 통찰은 없었기에 십자가에 돌아가심에 대한 말씀이나 부활을 잘 믿지 못하였던 것이며,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통찰력은 첫째,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하루 아침에 지혜로와 질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이가 많다고 하여 자연적으로 통찰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이가 적다고 통찰력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뜨거운 영적 부흥의 하루를 체험하고 난 후에 그들은 그 이튿날에 다시 에스라를 찾아갔습니다. 하루 가지고는 안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7일 동안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였습니다. 둘째, 통찰력은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은혜를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가 되는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에스라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입니다. 올바른 사람(right people)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통찰력이 주어집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없이 그냥 교회에 예배에,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 통찰력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배우는 어떤 사람은 계속 물을 빨아들이는 스폰지처럼 은혜를 받고 또 받고 합니다. 통찰력과 분별력을 지니는 영적 거장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배에 은혜의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통찰의 결과는 전적인 순종과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책을 밝히 본 결과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지니라”(14절하)는 것입니다. 성벽 재건을 완성한 후에 느헤미야가 온 백성을 수문 광장에 모이게 하여 에스라 학사로 하여금 말씀 선포를 하게한 때가 마침 7월 중순으로 초막절 혹은 장막절을 지켜야 할 때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로 한해 농사의 추수로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였습니다. 특히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이곳 저곳으로 장막을 옮기며 살던 때를 생각하며 7월 15일부터 일주일을 초막을 짓고 거기 거하면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풍성한 축복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바로 대 속죄일인 7월 10일이 지난 다음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바벨론 포로 생활 중이었으니 예루살렘에 마음대로 돌아올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초막절을 지키게 되었고 이것이 여호수아 이래 처음으로 온전히 지키는 초막절이 되었습니다(17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깊이 통찰하고 묵상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단 한번의 결심, 결단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계속 하나님의 말씀에 시간을 투자하며, 지혜를 구하고, 통찰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참된 행복이, 기쁨이 찾아옵니다. 16-17절을 다시보십시오.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때에 찾아오는 기쁨, 행복을 맛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간 만큼은 행복했습니다. 비록 초막(tent) 안이지만 말입니다.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참된 행복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지도자들에게 이 세상을 보는 시각, 지혜, 분별력 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허락하셔서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서 온 교회가 기쁘고 즐거워하며 참 행복을 느끼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는,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고, 배우고 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 기쁨이 있는 교회,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가 능력있는 가정과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야 하지만, 특별히 우리 자녀들에게, 청년들에게,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이 통찰력, 분별력,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부족하여 방황하는 자녀들이, 청년들이, 성도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존경하는 박 영선 목사님은 그의 저서 “통찰과 분별”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적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힌 병사는 오로지 탈출만을 생각합니다. 수용소에서 이발 기술이나 외국어 들을 배울 기회가 있더라도 반가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배움은 자유를 얻은 이후에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양상이 바로 우리 교육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자녀나 제자를 수용소에 갇힌 포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모두 놀고 싶다고 합니다. 방종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통찰력,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을 내다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계속 이렇게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오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누가 해결해 주어야 합니까? 지도자들입니다. 무엇으로 해결해 주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니다. 함께 배우며 씨름하면서 깊은 묵상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통찰함으로 하나님의 지혜, 뜻을 깨닫고 온전히 순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형통하기를 원하십니까? 통찰력을, 지혜를 소유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 . . 내가 또 너희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13)! 솔로몬은 지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잠 3:15-16) 라고 하였습니다.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말씀을 더욱 밝히 알기 원할 때에 놀라운 통찰력이 임하여서, 온 백성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을,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통찰력은 과거를 생각해보는 뛰어난 시각뿐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을 확신하며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내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하며, 무엇이 먼저 인지 우선순위를 바로 하여 내 삶을 규모 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합니다. 바로 다음 주일에 살펴볼 9장 이하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 . 너희 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7)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마음 자세를 바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 시간을 투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며, 깊게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통찰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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