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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07-09-06 (목) 00:5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967    
[9/2/07] 성도로서 이해해야 할 것
성도로서 이해해야 할 것 (사도행전 15:36-4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는 위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하나님의 자녀들, 즉 성도들이 모여서 옆으로는 서로 유기체적인 관계를 맺고 주께서 주신 사명들을 감당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이든지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특히 교회는 성도로서 꼭 이해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한 형제와 자매로 묶어주실 때에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이해할 것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서 얼마 지난 후, 유대 신자들 가운데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주장으로 분란이 있을 때에 교회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총회로 모여 많은 변론 끝에 결론을 내고, 공문을 유다 바사바와 실라를 통하여 각 교회에 보내기로 하여, 안디옥 교회도 그 서신을 받고 기뻐하여 그대로 행하여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서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행 15:1-35).
그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36절)고 제안을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1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갖게 된 형제, 자매들이 계속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지난번 사건처럼 유대인 신자들의 잘못된 주장으로 혹시 신앙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세상 유혹에 빠져 옛 사람의 생활로 돌아가 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첫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도 물론이거니와 교회에 찾아와 믿음이 생긴 초신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하기로 결심한 후에 사탄 마귀의 온갖 궤계로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래서 일대일 제자양육이나 제자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구역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모임에서 신앙을 점검하고, 더 양육과 훈련을 받아서 자라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씨앗을 뿌린 후에 그대로 방치하면 새가 와서 쪼아 먹거나 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햇빛에 말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속히 그들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비료를 주며 돌보아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전도한 사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지금은 전혀 주님과 상관없이 살거나 멀리 떠나버린 사람은 없습니까? 방금 출산한 갓난아기를 섬세하게 돌보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두면 병들거나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확실히 복음을 믿은 사람은 결코 그 믿음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잘못 이해하고 잘못 믿었던 사람이라면 금방 쉽게 주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돌보지 않으면 멀리 떠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돌아오게 되지만 말입니다. 누군가가 돌보고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큰 손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 바나바가 바울의 제안에 동의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이번에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자기의 조카인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37절). 그러자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38절)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그 배경이 13장에 있습니다. 4-5절에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처음 선교를 떠나 구브로 섬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에 조카(골 4:10)인 요한 마가로 하여금 수종을 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 13:13). 추측을 하자면 선교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따라 나섰다가 바울과 바나바가 핍박을 받는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거나, 처음 생각보다 힘들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이 발걸음을 돌이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선교 여행 중에 중도 탈락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 마가는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중도에 탈락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분명했던 바울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름 그대로 위로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그 때에는 잘못했지만 이제는 잘 할 것이라는 격려와 함께 그를 데리고 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조카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서로 다투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39절). 그래서 결국 갈라 서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면서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고 합니다(40-41절). 초대교회의 두 기둥과도 같은 바울과 바나바, 사실 바나바가 믿음에 있어서는 대 선배입니다. 바울도 바나바를 통하여 사도들에게 소개가 되고,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느냐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심히 다투고 끝내 서로 갈라지게 된 것을 보면서 참 그렇게 훌륭한 사도들도, 특히 바울도 연약한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헤어졌겠지요.
그런데 결국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다시 용납하고, 그가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디모데에게 부탁하여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하며(딤후 4:11), 심지어 사도 베드로는 그를 가르켜 자기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벧전 5:13). 바로 이 마가가 사복음서의 하나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영적 거장이 되었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지만, 그 일은 바나바와 베드로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한번 실수한 사람을 다시 잘 세워서 일꾼으로, 주님의 제자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성도들이 두번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 아무리 그렇게 위대했던 바울도 연약한 부분이 있었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여전히 연약한 부분들이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도, 물론 정도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허물이 있는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결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다투기도 하였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서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여야 서로 화목하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로 이해하여야 할 것은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록 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몸에 붙은 지체이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에서 배우듯이 우리는 자란 환경, 그 배경이 다르고, 믿음의 정도도 다 다르고, 그 색깔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은사도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또 달라야 각자의 분야에서 고유한 일을 함으로 전체적인 몸이 움직이게 됩니다. 손과 발이 다릅니다. 눈과 귀와 입이 다릅니다. 심장과 허파, 위, 간, 신장이 다 다릅니다. 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똑 같은 부모에게 낳았어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하물며 다 다른 부모에게 태어난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이, 말이, 행실이, 성격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하여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행실이, 성격이 다르다고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다르다고 꼭 틀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다른 것과 잘못된 것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그 사람이 틀렸다고 한다면, 여러분 자신은 늘 옳게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완전한 사람입니까? 바로 앞서 두번째 이해해야 할 것에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아무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역사상 완전한 사람을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만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늘 틀리다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하나님입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다만 엄청 교만한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완전하지 않다면 어떤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그가 나를 미워하고 있고 싫어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나와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비판하지 마시고 우선 그대로 용납을 하면서 좀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면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인간들의 잘못까지도 사용하셔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봅니다. 비록 바울과 바나바가 누구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느냐로 다투어 헤어졌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 따로 사역을 하면서 각 교회들을 굳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일들을 펼쳐가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처럼, 그 이후 사도들의 사역은 계속 진행되었고, 온 유럽에 복음이 전파되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다투고 헤어져도 결국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주장을 하면서 다투지 마십시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사실 결국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셨지, 당시에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들도 인간인데, 서로에게 섭섭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평신도들은 어떻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위에 계신 분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특히 처음 믿음을 가진 자들, 이제 막 구원의 감격 속에 새로 태어나서 자라가야 할 분들의 믿음을 굳게 해 주어야 합니다. 갓난아기를 양육하듯이 꾸준히 보살피고 돌봄으로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든든한 믿음이 되도록 세워주어야 합니다.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양육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받게 하며,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바나바처럼 비록 마가 요한이 한번 실수를 하였어도 다시 일으켜 세워 회복이 되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인도해야 합니다.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일대일 제자양육이나, 제자훈련반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기도하시면서 속히 참여하십시오. 다음 주일에 이에 관한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구역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참석하셔서 믿음을 굳게 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다 연약한 존재임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용납하셔야 합니다. 관대하여야 합니다.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행동, 다른 성격, 다른 태도가 꼭 잘못이라고, 틀린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이해의 폭을 넓혀 가십시오. 왜 그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하고, 그런 말을 할까 이해하려고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설교를 듣고, 성도로서 이해해야 할 것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신다면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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