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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1-06 (월) 12:2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005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요 4:23-24)


예배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예배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예배의 대상을 존경하며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라틴어애 의하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하여 경외하는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우리 인간의 최고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만왕의 왕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찾아가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려고 찾으시는 자들이 있는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만나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면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교인들을 볼 때 너무 안타깝고,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닌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분들은 하나님을 자기 친구보다도 못하게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예배를 능가하는 삶이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가 없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공감하는, 성경적인 선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이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롬 12:1).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면, 예배에도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지(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두려워하는) 분들은 공적 예배의 중요성을 압니다. 공적 예배가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의무인 줄 알기에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립니다.
   신년 첫 주일을 맞아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생활에 성공하여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예배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참된 예배(True Worship)가 무엇입니까? 예배 시간에 내 감정의 표현을 다한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내 안의 스트레스를 다 푸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우리는 종종 ‘오늘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사실 세상적인 노래라 할지라도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고 답답해 하는 부분을 긁어 주면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와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예배의 가장 다른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는데 비해, 다른 이방인들의 예배는 자기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 혹은 욕망의 표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지한 순간이 되면 기도하는 마음이나 자세가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하는 순간은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시간으로 알고 있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준다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본성과 우상 숭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김남준 목사는 우상 숭배는 종교심이 타락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심은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인데, 하나님과 만나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제사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자기 안에 얼마나 깊은 죄의 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은혜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간접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끊임없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간접적인 은혜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예배를 통하여 자기 안에 있는 종교심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이것을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과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6)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죄를 속할 필요가 없는 예배였고,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만족시켜주는 예배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 태양이나 돌부처처럼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자기 안에 있는 서러움이나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의 제사가 필요했던 이유는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속하는 피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는 과정에서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렸고, 또 짐승을 태우는 과정에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후에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피의 제사가 필요했고, 그 후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예배 행위 자체로 자기 만족을 누렸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사 자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했을 때에 그들의 예배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배가 얼마나 엄숙하느냐 엄숙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싫어할 때에 이방인들의 예배와 같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에는 아무리 형식이 초라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그 예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임하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직접적인 자기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한 시간의 예배 그 자체로 종교적인 갈증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자꾸 감각적으로 변하게 되고, 인도자는 사람들의 말초 감각을 자극해서 ‘은혜’를 받게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삶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며, 생활을 통하여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설교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반복하셨는데, 어떤 예배가 신령(in spirit)과 진리(in truth)로 드리는 예배인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감정적으로 열렬히 예배를 드렸는가 하면,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적으로만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신약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는 단번의 제사를 드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교회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눈 앞에서 짐승을 잡아 죽임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짐승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죄의 선포를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영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는 것을 그저 눈에 보이는 목사님의 강연을 듣는 것이나 찬양대의 노래를 감상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는 모두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일어서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 우리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또 사죄의 은혜를 받는 것,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헌금을 드리고 또 설교자가 교인들을 축도하며 파송하는 것 각각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순서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참된 예배입니다.
   설교 전에 이루어지는 죄의 고백이나 용서의 확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던 번제에 해당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신앙을 확인하는 신앙고백과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순서가 건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졸거나, 옆 사람하고 속삭이거나, 주보를 연구하거나, 전화를 가지고 장난하는 것, 자꾸 시계를 보면서 빨리 끝나지 않나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하면, 지루한 시간 견디려고 애쓴다면 그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좋지 않은 것으로 시험을 받고 갑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으로 시기, 질투를 하거나, 꼴 보기 싫은 누구를 비판이나 합니다. 대표기도가 어떻다, 찬양이 어떻다, 불평 불만으로 가득 채우고 교회를 떠나니 한 주일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죄성을 가진 목사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칼빈을 말하기를 ‘목사가 성경을 풀어 설교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원천적인 권위는 성경 그 자체에 있지만,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성경을 그대로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 영광의 절정, 영광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 예배가 은혜가 됩니까? 바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깊은 갈급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죄 문제이고 죄가 파생시킨 수많은 상처들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인간의 깊은 본성을 해부하여 죄를 치료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무자격 의사가 사람을 수술하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없는 목회자일수록 다른 것을 끌어오려고 합니다. 예배당을 꾸미는 데에, 찬양으로 대신하거나, 연극을 동원하기도 하고, 별별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사람의 종교성을 자극하여 은혜를 끼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김남준 목사는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은 정직한 목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말씀의 종입니다.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소명입니다. 기도하며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여 오늘날 고통 받으면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참 의미를 전해줄 사명을 지녔으며,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성령의 감동이 아닌 것으로 교인들의 종교심에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은 신학적인 매춘행위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살아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이 목사가 더 이상 교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목사라는 칭찬을 받을 생각도 하지 말고, 말씀 하나만 붙들고 주님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입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교인을 잃을 각오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외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강대상에서 멱살을 잡혀서 끌려 내려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바로 전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끝으로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참된 예배의 꼭 있어야 할 순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는 1) 구원의 선포, 찬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찬양하였습니다. 출애굽 사건, 광야 생활에서의 은혜, 가나안 땅에서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건지심 등 말입니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가장 큰 구원은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롬 1:16). 그래서 이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예배에서 끊임없이 찬양되고 또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2) 예배의 기능은 죄 사함과 치유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전 인격적인 치유가 이루어 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죄는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다 병들게 하고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검은 보자기가 덮인 것처럼 항상 모호하고, 또 감정도 굳어져 있어서 눈물도 없고, 감격도 없으며 기쁨도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서 그렇게 자신이 소중해질 수 없고,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3) 그리고 설교입니다. 예배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 만나주셔서 하실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어떤 가치관, 인생관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도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 철학이 있고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바로 세상적인 삶의 원리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이 그저 잘못을 고백하고 자신의 좋지 못한 상태를 보고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후회하면서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죄의 길에서 의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길인지 배워서 잘못간 길에서 돌이켜 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4) 간구와 기도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던,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던, 예배에서의 기도와 간구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많은 어려움들은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감당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의 문제나 교회 전체가 당하는 어려움, 그리고 내 자신의 어려움을 솔직히 내어 놓고 함께 도우심을 간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바꾸기도 하시지만 성령으로 나를 바꾸셔서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도 하십니다. 5) 헌신과 축복과 파송입니다. 예배에는 반드시 헌신의 표시로 헌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나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물질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인 동시에 헌신의 표시입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것입니다(말 3:8-10; 마 23:23). 그리고 나서 목사가 교인들을 축복하며 세상으로 파송하는 축도를 드립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예배를 마치면서 목사가 축도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만인 제사장 시대에 왜 목사만 교인들을 축복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당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성도들을 축복하여 세상으로 보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기를 원하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만일 말씀을 전한 자가 주님을 대신하여 교인들을 축복할 권한조차 없다면 예배 중에 들은 설교는 누구의 말이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이 주님을 대신하여 회중을 축복하여 들은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도록 파송하는 것은 당연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도가 끝나기 전에 나가시는 분은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사모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찾아 만나주시겠다고 하는데 거절하시겠습니까? 소중한 만남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하십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고전 3:16). 비록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 죄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세상적인 자랑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만을 붙들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신령과 진리 안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배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내가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 드리러 오면 예배가 어색하고 별로 은혜가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 내내 쓸데없는 염려와 잡생각에 빠져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에 임하면 예배 시작부터 찬송에 힘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는 예배는 내가 변화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올해 한해 그런 성공적인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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