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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3-07-01 (월) 12:3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89    
방언의 은사(1) (고전 14:1-19)


12장에서 영적 은사를 강해할 때에 언급하였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14장 전장에 걸쳐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당시 우상을 믿는 이교도들도 때로 황홀경(ecstasy)에 빠져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방언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며, 올바로 방언을 사용하도록 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을 했던 성경 기록이 있은 후, 초대교회 교부들(Early Church Fathers) 시절을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도, 아니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두 차례의 대각성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에도 방언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다가 1890년 대에 일어난 오순절 운동(Pentacostal Movement)이 일어나면서 거의 1900년 만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날 때에도 방언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약 30-40 년 전부터 순복음교회에서 시작된 이 방언의 은사가 기독교계에 이슈가 되어 왔습니다.
   저는 14장을 살펴보면서 오늘부터 세 주일에 걸쳐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설명드리기 원합니다. 오늘은 방언의 위치, 그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기 전에 우선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절)고 하였습니다. 이미 13장에서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그 특성들을 설명했고, 아무리 신령한 은사나 기적이 나타난다 해도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고린도교인들은 사랑을 추구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 “따라 구하라”는 원어는 ‘따르다, 쫓다, 추구하다’라는 뜻으로, 신령한 은사를 구하는 것도 좋은데, 사랑을 먼저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 모든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면서 구하되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구하여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물론 방언과 비교할 때 말입니다. 주된 이유는 방언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덕이 되는 것이지만, 예언은 다른 사람의 덕을, 교회의 덕을 세우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2절)고 합니다. 이 구절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방언과 오순절날 초대교회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방언(행 2장)과 다르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방언을 하늘의 언어라고도 합니다만,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여기 본문의 방언도 똑 같은 단어로 외국어를 뜻합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다 받은 방언은 당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들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외국어가 분명합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본문 2절에도 다른 나라의 언어이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한다는 뜻은 오순절 때도 하나님께 방언으로 이야기 했는데 그 언어를 알아듣는 다른 나라 사람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방언 자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같은 방언이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언은 예언과 달리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3-5절)고 하였습니다. 이미 12장에서 은사들을 설명할 때에 누누이 어떤 은사든 교회에 덕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통역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이 교회 안에서 무슨 덕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자기 집 골방에서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덕을 세우는 데에야 방언이 유익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여 심령을 강하게 한다면 교회의 덕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예를 들어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6절) 라고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유명한 사도 바울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찾아와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인격적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제하며 교훈을 배우며 사는 것인데, 비인격적인 언어를 가지고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소리 나는 피리나 거문고, 나팔에 빗대어 말합니다. “혹 저(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7-9절)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없는 피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내어도 뚜렷이 다르게 소리를 내야 피리 소리인지, 거문고 소리인지 알게 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나팔 소리를 분명히 내 주어야 전쟁이 곧 일어나는 줄 알고 준비를 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혀로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것이라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방언을 통역해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전달해 주는 것은 없고 사람만 헷갈리게 하는, 허공에다 하는 헛소리라는 것입니다. 아니 영적 소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비유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기 위하여서는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이 세상에는 여러 언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리니”(10-11절) 라고 합니다. 여기 우리말 번역에는 “소리”라고 했지만, 원어에 의하면 ‘언어’를 말합니다. 세상에 많은 언어들이 있지만, 아무 뜻도 없는 언어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면 나는 야만인(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언어를 못 알아들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그 사람도 내게는 야만인(외국인)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린도교인들이 교회에서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한다면 서로 야만인(외국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신령한 은사를 사모한다면 교회에 덕이 되는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12절)고 하였습니다.

   결론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13절). 통역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바울은 내 영만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마음에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4-17절)고 하였습니다. 나의 영과 마음이, 즉 심령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해야 열매가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무식한 처지에 사람을 놓고서 자신이 아무리 감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해도 아멘이 어떻게 나오느냐는 말씀입니다. 본인은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지 몰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감정적으로 황홀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을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8-19절)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얼마나 방언을 많이 하는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합니다. 훨씬 더 많은 방언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방언하는 것에 대하여 절대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하여 깨달은 것을 가지고 다섯 마디만 해도 일만 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통역의 은사를 함께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의 이기적인 사용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방언을 통역할 수 없다면 교회에서는 사용해서는 안됩니다(28절). 그저 자신의 골방에서 자신의 덕을 위하여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에 의하면 만약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지 못한다면 별로 덕이 될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음에서도 깨달아져서 와 닿아야 은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 영이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내 마음에 와 닿아야 정말 은혜가 되고, 덕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미가 있는 기도와 찬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교도들처럼 무슨 황홀경에 빠져서 허공을 향하여 헛소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이나 지식, 지혜의 은사, 다른 사람을 권면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가 교회에 덕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은사의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목적을 이루려면 분명하게 의사 소통 할 수 있는 은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의사소통이라고 하는 것은 핵심입니다.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매일 교제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성경 66권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 분명한 말로 감사와 찬양과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가 어떤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을 내 주위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함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정말 교회의 덕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슨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라는 간증이야말로 주위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였거나, 죄에 빠졌거나, 이단에 속아 넘어가서 혼동을 겪고 있는데 내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고 똑똑히 전하며, 내가 받은 은혜를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전해야 그 사람에게 덕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아는 일에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저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에게도 덕이 되고,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쳐서 변화를 받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덕이 되는 것입니다. 덕이 되는 말로 선한 영향을 끼칠 때 바로 교회 전체에 덕이,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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