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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11-28 (월) 08:3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934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연합(1)(롬 14:1-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내용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하셔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이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들도, 사도들도 때로 하나가 되지 못했었습니다.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 심지어 빌립보교회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이 하나이기를 원하신 것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아름다운 조화(Harmony)를 이루기 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처럼 서로 많이 다르지만 연합(Unity)을 원하신 것이지, 북한처럼 인간성을 없애는 획일성(Uniformity)을 요구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구요. 인간이 로봇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는 모두가 다 나와 같았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다른데 말입니다. 온 세상 사람 가운데 나와 똑 같은 DNA 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각자 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 왔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됨, 연합의 비결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본질적인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본질적인 것, ‘아디아포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부분이 같으면 주님 안에서 다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한 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며 비판하지 말고 받아주라고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받되’라는 단어는 문법적으로 의지적으로, 개인적으로 받는다는 뜻이며, ‘의심한다’는 말은 진리를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라 논쟁이 될만한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하여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장 문맥에 의하면 여기 ‘믿음이 강한 자’는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입니다. 반면에 믿음이 연약한 자는 율법의 구속을 받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렇게 못하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 그들을 힘들게 하거나 넘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고 말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실족한다면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받아주어야 합니까? 왜 그들을 업신여기고 비난하면 안됩니까? 네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2-3절)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율법에서 금하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채소만 먹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거의 다 우상제사를 드리고 난 고기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 때문에 자유롭게 고기를 먹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우상은 죽은 신인데 그 앞에 놓여진 고기를 못 먹을 게 뭐가 있나 다 하나님이 먹으라고 주셨다고 자유롭게 먹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면서 하나가 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기를 먹는 그리스도인이던 먹지 않던 그리스도인이던 다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용납한 것을 가지고 감히 우리가 비판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탱하게 하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4절)고 하였습니다. 즉 믿음이 강한 자든, 약한 자든 다 주인이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서 있는 경우에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넘어졌으면 일으켜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둘 다 다 하나님의 하인, 주님의 종인데 누가 누구를 비판하며 받아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주인이 알아서 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좀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기도만 해주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다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신앙양심에 따라 주를 위하여 산다면 받아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5절)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월삭이나 안식일과 유월절 같은 절기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날로, 절기처럼 지키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judge)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마음에 확정하고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절)고 하였습니다. 즉 고기를 먹는 사람도, 먹지 않는 사람도 다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양심껏 주를 위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자의 신앙양심대로 하는 것을 존중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7-8절)! 무슨 말씀입니까? 신앙생활의 동기, 목적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라면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말은 ‘주를 위하여’ 해놓고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할 때 자주 ‘주를 위하여’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주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상대방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종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내 양심상 옳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나만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넷째는, 우리 모두 각자가 다 하나님 앞에 서서 판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약한 자가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판단하거나,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판단을 받을 때가 옵니다(고후 5:10). 상을 받을 자와 잃을 자를 심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다 자백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서 45장 23절을 인용하면서,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1-12절) 고 하였습니다. 직고한다는 말은 회계(계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다 하나님과 계산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위한 말과 행동이었는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 믿음이 강한 자든, 약한 자든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며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일까요? 하나되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기도 응답이 있는 교회가 아닐까요? 서로 다른 점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같고,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하나님이 같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같다면 한 마음으로 하나됨을 지켜가는 교회가 아닐까요?
서로 사랑으로 용납하고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됩니다. 반면에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론에 언급하였듯이 본질적인 것에는 타협이 없어야 합니다. 진리, 비진리 문제라면 결코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 비본질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고 양보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다니면서 담배를 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직은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나는 믿음이 강하다고 그런 사람을 비판하고 욕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그 모습 그대로 받으셨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하나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권면하기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3-6)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 그 모습 그대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능력으로 지키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을 위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아니 각자 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온전히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누가 나와 다른 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됨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려고 애를 쓰시고, 이해가 안 되어도 그저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십시오. 소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은혜를 입은 자답게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덕(virtue)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랑할 수 있어서 하나됨을 지켜 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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